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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0.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관리자 2014-07-20 (일) 11:00 9년전 1041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1-19

 

세계적인 부자였던 록펠러는 36세때 백만장자가 되었고 48세에 미국에서 제일 큰 회사를 경영했고, 53세에는 억만장자가 되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경쟁회사를 무너뜨리거나 합병하고 시장을 독점해 ‘부도덕한 독점재벌의 표본’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습니다. 특히 록펠러는 살인적인 노동력 착취와 저임금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전미 광산노조가 주도한 쟁의에 민병대를 투입해 40여명을 숨지게 한 1913년 ‘러드로 학살’은 지금도 록펠러 집안의 오점으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당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라는 오명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록펠러가 55세에 ‘알로페시아’라는 불치병에 걸리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음식을 전혀 소화하지 못하고, 나날이 눈썹과 머리카락이 빠졌습니다. 게다가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최후 진단을 받고 휠체어를 탄 채, 참담한 심정으로 병원 로비를 지나다가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에 감동을 받은 그는 그때부터 나누는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적적으로 병이 사라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후 무려 40년 후, 97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은퇴 후 그는 본격적으로 기부를 실천했습니다. 사회사업에 총 3억5000만달러를 기부했고, 1913년에는 인류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록펠러재단을 세워 기아근절, 인구문제 해결, 대학발전, 문화발전, 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원조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 재단은 지금까지 20억 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전 세계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또한 록펠러는 미국 전역에 약 1,000개의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하기도 하였습니다. 록펠러는 인생 후반기에 신앙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찾게 되었고, 이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새로운 기업가적 윤리기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신앙 안에서의 개인적인 변화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선한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전적인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흔히 ‘인간의 본성은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격을 도야하고 수행하여 어느 정도 변화를 꾀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결국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본래 이기적인 인간에게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라”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제 버릇 개 못준다’는 속담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나쁜 버릇도 고치기 힘들어 합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새로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 지위, 자기 수양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진정으로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비에서 주님을 만나 새사람으로 변화된 것은 록펠러뿐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의 속죄의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신앙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요즘들어 각종 매스컴에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한 모습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개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자칭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과 기독교 국가가 상상할 수도 없는 추악한 만행을 저질러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새롭게 해주시는 분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교회를 등지거나 기독교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언행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사칭한 자들의 언행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겠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새롭게 하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새롭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이 경험했습니다. 유대주의자였던 바울은 자신의 지위와 지식을 앞세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으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180도 변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인생 끝 날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바울이 불원간 심판대 앞에 선다고 해서, 공포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본적인 태요입니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신명기에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라고 대답했습니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했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경외심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는 인간이 바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

 

어떤 노련한 사공이 작은 고깃배를 타고 바다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오는 것을 보고, 곧 폭풍이 불어올 것이라고 예측하고는 항구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많은 젊은 남녀가 탄 놀잇배 한 척이 바다로 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공은 그들에게 “조금 후에 광풍이 일러날 것 같으니 지금 당장 항구로 들어가야 합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늙은 사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점점 바다를 향해 나가는 놀잇배를 보고 사공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요.” 하지만 젊은이들은 서로 즐겁게 웃고 떠들 뿐, 사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 놀잇배는 폭풍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곧 주님의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인들 앞에서 성실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윤리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언행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자신의 언행에 조심하지 않았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악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언행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기 보다, 비윤리적인 그리스도인을 대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행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의 언행의 결함 때문에 경시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 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가 영광 받아야 됩니다.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언행이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끌고 와 총독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진술을 듣고 놀라면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다”(행 26:24)고 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복음을 들었으나, 귀가 어두워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에게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온전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베스도 총독을 비롯한 지배계층은 비록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는 차지하고 있었으나 눈과 귀가 어두운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베스도 총독이나 그때 당시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또, 많은 사람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 복음만 전해질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십자가의 길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사람들은 ‘매니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게임 매니아’, ‘자동차 매니아’ 등, 무엇인가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에 미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 미쳐서 인간으로서 품위를 버리고 추한 꼴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세상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미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복음에 대한 열광적인 헌신은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예수님의 사역에 열광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을 성실하게 살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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