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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너희 지경을 넘어

관리자 2014-11-02 (일) 11:00 9년전 1048  

너희 지경을 넘어

고후 10:7-18

대학생 두 명이 알프스 산을 등반하는데, 과거에 알프스를 등반했던 경험이 있어서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가이드를 동반하지 않고 그들만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며 등반을 시작한 지 얼마 만에, 드디어 두 친구는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더니,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구조하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살아서 산을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이드와 함께 등반을 했더라면, 눈보라가 불어 닥치기 전에 안전하게 하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자신의 경험만 믿고 자신 있게 올라갔다가 큰 변을 당한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시체가 발견된 곳 가까이에 산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조금만 더 내려가면 그 산장이 있는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인생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눈앞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경험만 믿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도구를 갖추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경험 많은 안내원들의 안내를 받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만 믿고 무모하게 알프스 산을 올라간 대학생들처럼, 자기들의 학문과 재능을 믿고 잘난체하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죽음이라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방향감각을 잃고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생의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안내자는 인생의 초보자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고, 다양한 경험을 했더라도 누구에게나 인생은 처음이요 마지막 등산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편 146:3-4)

대신에 우리에게 필요한 인생의 안내자는 인생이 가는 길을 아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이여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욥 23:10)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우리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안내자로 모시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참다운 안내자인 예수님을 외면하고 각자 자기 마음대로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겨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만이 우리 인생의 참된 안내자임을 깨닫고, 참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전파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그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여 예수만을 인생의 안내자로 모시고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거짓 교역자들이 들어와서 그러한 진리를 훼방하고,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거짓 교역자들은 유대주의자로서, 예수를 믿기만 해서는 구원을 완성할 수 없고, 구약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율법을 준수하고 이에 대한 증거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그러한 율법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며 비난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바울의 사도로서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라고 하면 예수님 생전에 함께 활동하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바울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또 바울이 한때 교회와 신자들을 박해했던 자였는데, 갑자기 ‘자칭 사도’라고 하면서 전도하고 다니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마치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과시하며 바울을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는 태도는 전형적인 거짓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동부 아프리카 교회에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부흥운동의 특징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원주민들이 참여해서 죄를 고백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도 유럽에서 온 백인들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뻣뻣이 서 있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그것에 대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고백에 참가하지 않는 백인들은 용서받은 죄인들의 사귐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오만하다’든가 또는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교회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사귐’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결코 교만할 수가 없다. 교만한 그리스도인의 잘못은 자기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면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에 대한 비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울의 외모에 대한 인신공격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거짓 교사들의 충동을 받아 부하 뇌동하였습니다. 기록에 보면 바울의 외모가 그렇게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 200년경에 쓰여진 “바울과 데클라행전”이라는 책에 보면, “바울은 키가 작고 이마가 벗겨지고 다리는 구부러지고 몸집은 뚱뚱하고 눈썹은 맞붙고 또는 매부리코인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상 그의 인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기록에 보면, “...그런데 은혜가 넘쳐 때로는 사람으로, 때로는 천사의 얼굴로 보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외모는 그의 인격 및 신앙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외모를 가지고 시비를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이 역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들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과 언론에서도 외모지상주의를 부치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니 취업을 하는데도 업무 능력이 아니라 외모를 가꾸는 데 더 치중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외모중시풍조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죄악된 것입니다. 오늘날 각종 미인대회와 성형산업의 팽창은 상업주의와 쾌락주의를 통한 외모지상주의의 결정판이라고 할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미친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몸집이 작고 가냘팠기 때문에 조금만 강한 바람에도 넘어질 듯, 왜소한 체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왜소한 외모와는 달리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시킴으로써 근대 역사에 거인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입니다. 그가 하원에 들어갔을 때, 영국은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흑인 노예무역으로 충당하였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불법적으로 약취하여 유럽 각국에 팔아넘김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신앙인으로서 그런 비윤리적인 행위를 통해 국가 예산을 채우는데 항의하고 노예해방법을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노예무역의 특혜를 맛보고 있던 영국 국회의원들은 윌버포스의 주장에는 이의를 달지 못하고, 그의 외모를 조롱하는 방법으로 그를 꺾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숱한 모욕과 조롱 속에서도 전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시와 노래, 사진 판매, 노예 제도를 통해 생산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 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 제도 폐지를 전개하였습니다. 드디어 1807년, 영국 하원은 그에게 유례 없는 열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 무역 폐지법'(The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고, 1833년에는 '노예 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언젠가 모스웰이라는 사람이 윌버포스의 연설을 듣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새우가 책상 위로 오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까 자꾸만 그의 체구가 큰 고래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외모나 지식이나 세상적인 능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복종하는 자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잘나고, 많이 배우고, 재주가 많고, 많이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7)

바울 또한 외모만 중시하는 거짓교사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먼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답게 처신할 것을 요구합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후 10:7)

이와같이 바울의 외모를 가지고 비난했던 거짓교사들의 가장 큰 오류는 그들이 모든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

그들이 바울을 비난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출신, 자신의 지위 등을 기준으로 삼고 남을 판단하다보니 바울도 비난하였던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예수님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 인생의 참다운 안내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임에도, 여기에 유대인이라는 혈통과 율법을 소유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의롭게 인정하기보다는, 주께서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표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을 내세웠던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전하고자 했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사실을 모든 세상에 알리는 것을 소원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지경너머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고후 10:16)

W.M.맥그레홀이 말하기를, “바울은 지경 너머에 매력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항구에 있는 배를 볼 때마다 저 배를 타고 지경 너머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는 또 멀리 있는 산을 보면서 그 산을 넘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

카플링이 쓴 “탐험가”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지경 너머에 매력을 가졌던 사람에 대한 노래입니다.

“이상 더 가봐야 소용이 없지 여기가 바로 문명의 끝이라네.

사람들은 말했고 나도 그걸 믿었지

그래서 그 땅을 갈고 씨를 뿌렸네.

창고도 짓고 작은 변경의 땅에 담도 둘렀네.

산록이 가까워지고 오솔길도 끝나는 그런 땅인데

그런데 양심에서 우러나는 연한 소리가 끊김없이 변함없는 속삭임으로 밤낮없이 반복해서 들려오는데 - 말하기를 숨은 보화가 있도다. 가서 찾아라

언덕 너머에 가서 찾아라

언덕 너머에 숨은 보화가 있도다.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찾아라.”

 

이것은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위대한 전도자는 큰 도시의 다리를 지나갈 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몇 백만명의 사람들이 터벅터벅 땅을 밟으며 걸어가는 소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속죄를 받고 영생을 얻은 우리도 이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4천만이나 되는 우리 민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계 50억이나 되는 이들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 저 언덕너머로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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