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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1.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더욱 영광스러운 삶

관리자 2014-06-01 (일) 11:00 9년전 1002  

더욱 영광스러운 삶

고린도후서 3:4-11

 

독일에 스턴버그(Sternberg)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벌이를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는데, 한번은 교회의 요청에 의해 아무 뜻 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그는 그의 본업으로 돌아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여자 모델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교회를 다닌 적이 없는 그 여자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성화를 가리키며,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그림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모델은 "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틀림없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겠군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무 생각없이 "암, 그렇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화가는 자신이 한 말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과연 예수가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고민들 거듭하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기가 대답한 말의 참뜻을 알기위해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그는 “주여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의 얼굴을 그리게 하소서” 라며 눈물로 기도하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복음 19:5절의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하는 말씀을 바탕으로 성화를 그리게 되었고, 그 그림은 역사에 남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을 성령으로 변화시켜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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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    도 본래는 평범한 한 수녀였습니다. 191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테레사 수녀는 대단한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많은 학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찍이 수녀가 되어 기차여행을 하다가, 역전에 가난한 이들의 실상을 목격하던 중에 하늘에서 “저들을 위해서 살아라”는 음성을 듣고 수녀원을 나와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50년,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인도의 캘커타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워 빈민과 고아와 나병환자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후 그녀의 헌신은 세상에 알려졌고 결국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나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돌봐야 할 사람을 돌볼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적으로는 고생스러운 일들이 오히려 자기에게는 기쁨의 일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해야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붙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은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정으로 불타올라, 그 당시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소아시와 유럽을 종횡무진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운 것도 그런 선교의 열정으로 감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단한 일을 감당한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바울은 그가 한 일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신은 단지 맡겨진 사명을 실행해나가는 도구일 뿐,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해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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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이라는 소설을 써서 노예해방에 대한 공론을 이끌어낸 스토우 부인(Harriet Beecher Stowe,1811~1896)    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써서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고요? 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쓰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비천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뿐입니다.”

‘흑인 해방의 어머니’라는 칭송을 들었던 그녀는 자신의 작가로서의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감당하였으면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 일을 보라”고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는 잠언 16:9절의 말씀처럼,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은 “능력주시는 자 안에” 있을 때에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모든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궁극적인 능력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가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얻으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종 된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영국 육상대표로 참석한 에릭 리들(Eric Henry Liddell, 1902~1945)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 주 종목인 100m 출전을 포기했지만,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따고, 400m에도 출전하여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첫 출전한 400m에서 우승한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충분하도록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변화시켜야만 가능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수련을 하고, 인격을 닦아도 인간의 근본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헬라어에는 새롭게 된다는 의미의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네오스”(neos) 인데, 이것은 주로 어떤 단어의 앞에 붙어서 과거에 있던 어떤 것이 새로운 형식으로 재등장할 때 주로 쓰입니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를 ‘네오리버럴니즘’(neo-liberalism)이라고 한다든지, ‘신나치운동’을 ‘네오 나치즘’(neo-Nazim)이라고 합니다.

이와는 달리 “카이로스”(kairos)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 전혀 새로운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전혀 새롭고 신선하여 지금까지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질적 변화를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새 언약’은 여기에서 카이로스를 말합니다. 이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질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출애굽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 즉 십계명을 ‘옛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으로써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은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인간이 수긍을 하든지, 않하든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언약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옛 언약’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계명을 받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는데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29-30).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모세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 빛은 그 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민 20:10-13). ‘옛 언약’에 나타나는 그 빛은 제한적인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영광은 영원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7-8) 모세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그림자일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3:11).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한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영원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과 영광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지막 구원의 기회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어나고, 그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엘리야는 사르밧에 사는 가난한 과부 모자를 찾아갔습니다. 흉년으로 양식이 다 떨어진 그 과부는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떡을 먹고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쑥 나타난 엘리야가 그 떡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죽기 전에 먹으려고 했던 마지막 떡을 달라고 하다니, 상식적으로 보면 전혀 이해가 안되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그 떡을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가뭄 가운데서도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베풀면 베풀수록 풍성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 자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고 자신만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데서 머무르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의 영광으로 불러주시고, 능력을 부어주신 주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 뜻을 이루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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