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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9.강남교회 총동원주일 낮예배 설교 - 영생을 얻으려고

관리자 2014-10-19 (일) 11:00 9년전 1076  

영생을 얻으려고

막 10:17-22

 

오늘 총동원 초청주일을 맞아, 강남교회를 방문해 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뜻깊은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의 한 가톨릭 신부가 “나에게 돌을 던져다오”라는 책을 썼는데, 그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고해성사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그 신부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하는 내용을 보면, 심각한 문제보다는, 대부분이 ‘먹고 사는 문제’, ‘사업문제’, ‘자식문제’, 아니면 ‘건강문제’ 같은 사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될, 이런 사소한 일들을, 마치 큰일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고 근심하면서 살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문제가 가장 중요할 것이고,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는 직장문제가, 아직 결혼을 못한 사람은 결혼문제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다음 달, 11월 13일에는 수능시험이 있는데,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에게는 대학입시와 진로 문제가 가장 절실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오늘도 저마다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아무 걱정 근심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겹치다보면 더 큰 문제 앞에서 작은 문제들은 별로 문제가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들어 자녀가 좋은 대학을 못가서 고민하는 사람도, 그 자녀가 다치거나 아프면, 더 이상 대학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오직 자녀의 건강 문제만을 가지고 고민합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들은 저마다 그 경중이 있는데,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가장 무겁고,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인간의 과학기술에 의해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죽음의 문제 앞에서 인간을 속수무책이며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사고나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두려워하며 관심을 가지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고, 이 문제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만 발견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죽음의 문제가 인간이 때때로 느끼는 공허함의 근본 원인입니다. 어느날 문득, 여러분이 자부하였던 건강, 재물, 명예, 권력, 인간관계 등등이 공허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마치 블랙홀이 주변의 사물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처럼 죽음의 문제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공허하고 허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않으면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을 메우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고민하고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일시에 무력하게 만드는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이 문제로 고민하는 한 부자 청년 관원이 나옵니다. 요즘은 청년 사업가들이 많지만, 고대 사회에서 청년이 자기 힘으로 부자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청년은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재벌 후계자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경제적 문제는 해결된 사람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때여서 일반 백성들은 궁핍한 생활을 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부자라면 정치적 권력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부자이면서 또한 관원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것은 유대의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의 회원이라는 말인데, 말하자면 오늘날 국회위원과도 같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정도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권력의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된 사람입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이 청년은 윤리적으로도 거의 완벽할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의 계명을 잘 준행하였다고 자부할 정도였으니, 많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는 사람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매우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인한 명예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촉망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삶을 살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나사렛 시골의 목수 출신이 젊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7)

이때의 예수님은 이제 서른 남짓한, 나사렛이라는 촌구석에서 목수를 하던, 젊은 선지자였습니다. 한마디로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 지도층 인사인 그 부자 청년 관원이 사람들이 많은 길에서 예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영생에 대해 질문하였다는 것은(막 10:17), 그가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 된 사람인지, 얼마나 절실하게 진리를 추구하며,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진리 앞에서는 자신의 체면과 위신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과거에 예수를 만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를 그냥 나사렛 출신의 촌뜨기 선지자 정도로 치부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는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며, 본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 보셨습니까? 엄한 부모님이나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람도 있고, 프러포즈를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무수히 무릎을 꿇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진정으로 우리의 진심을 다해서 기꺼이 무릎을 꿇었던 대상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살면서 어떤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무릎을 꿇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할 대상은,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열쇠를 지닌 자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부자 청년 관원은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 부자 청년처럼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 청년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분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 청년은 무릎을 꿇고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십계명에 나오는 이웃 사랑의 도를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그와 같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일반적으로는 “그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요구를 하시지 않는데, 이 사람에게만은 특별히 그렇게 요구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부자 청년 관원에게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영생이 더 주요함을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있고, 진리를 사모하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재물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재물도 가지고 영생도 가지고 싶었습니다. 세상 것도 가지고, 영원한 생명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청년에게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재물이 더 중요했습니다. 재물 앞에서 영생이나 죽음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걸림돌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기에, 예수께서 그와 같은 특별한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이 특별한 예수님의 요구 앞에 그 부자 청년 관원은 결국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고 맙니다. 도저히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을 떠나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명예, 권력, 재물에 집착하느라, 죽음과 영생의 문제를 도외시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부자 청년 관원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영생도, 재물도 가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영생’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붙잡을 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야말로 세상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늘 보다는 재물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고, 편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인도해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 곧 영생을 붙잡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재물 때문에 영생을 포기한 그 청년의 오류를 범하지 말고 영생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참 진리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아버지의 모든 재물이 자기에게 상속되는 것을 사양하고 영생을 택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의 길을 선택하여 영생을 얻게 되었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의 영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

오늘 주님은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에게, 이 청년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오늘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당연히 재물을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선택하였다가 그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영생보다 물질에 우선권을 두었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물질입니까? 영생입니까? 세상의 그 무엇보다 영생을 선택함으로, 하늘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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