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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9.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하나님의 열심

관리자 2014-11-09 (일) 11:00 9년전 1140  

하나님의 열심

고후 11:1-6

 

LA 영락교회를 섬기던 김계홍 목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목사였습니다. 그분은 40여년을 목사로 살았습니다. 6.25때 북한 지역에 살던 김 목사님은 목사라는 신분 때문에 받게 될 박해를 잠시 피하기 위해서 1.4후퇴 때, 남하하였으나 그 뒤 휴전선이 가로막혀 영영 북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홀로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후배 목사들이 찾아와 안부 인사를 드리며, “목사님, 목사님은 평생을 사모님 없이 홀로 사셨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항상 청춘으로 산다네”하고 대답했습니다. 후배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세요?”하고 물으니, “내가 아내와 헤어질 때, 아내의 나이가 29세 였는데, 나는 늘 그 얼굴만을 기억하고 사니 늘 청춘이라네.” 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외우셨습니다.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간 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엔가 살아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1999년에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사모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청춘에 헤어진 두 분은 어느덧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고, 갓 난 아이였던 두 아들들은 이미 중년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감격스러운 만남이었습니다. 그 긴 세월을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던 김 목사님은 그날 밤 감격스러운 해후 이후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김 목사님의 사랑은 휴전선도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떤 환난도 침노할 수가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간 사랑이요,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셔서 그 험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데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위해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나가 죄악에 빠지게 된다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거룩한 분노를 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시기를 하실 것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애굽기 34:14). 이것을 본문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런 열심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정결하게 하나님께만 속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처녀로, 그리스도는 남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와 하나님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표현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사 54:5),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라고 비유했는데,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에는 신랑의 친구들이 맡은 역할이 있는데 하나는 신랑의 대리, 또 하나는 신부의 대리였습니다. 또 그 친구들은 신랑과 신부 사이에 연락하는 일도 하고, 결혼식에 참석할 손님들에게 초대장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책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부의 순결을 보증하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점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고린도 교회의 결혼에 있어서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하였는데, 신랑의 친구가 신부의 순결을 보증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는 고린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부가 되도록 청순함과 순결함을 보증하는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

여기에서 바울은 그 시대에 유행하는 전설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실제로 유혹하였으며 가인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순전한 신부와도 같았던 고린도 교회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 그리스도를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순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세속을 따라서 탐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함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되신 그리스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정결한 신부로 서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이와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바울이 전한 말씀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마치 정통성을 가진 위대한 사도인 것처럼 선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명연설가들이고 학문에도 능해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그들에게 넘어가 버렸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6)

비록 바울이 말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바울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져 있었고,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전해지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 잘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 넘어가 바울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방송매체를 통해 유명해진 명연설가들이 많습니다. 특히 설교가들 가운데 말을 잘하고 흥미를 이끌어내는 유명한 이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그들의 설교를 듣고 열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설교는 감동을 주는 연설이나 웅변이 아닙니다. 설교가의 신앙고백과 삶이 묻어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실된 말이지 화려한 화술이 아닙니다.

 

어느 날 밤, 몇 명의 사람이 모여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 돌아가며 한 가지씩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유명한 배우 차례가 되자, 그가 일어나서 모든 웅변술과 연기 기교를 다 동원하여 시편 23편을 낭독했는데, 그가 앉자마자 박수가 마치 우레와 같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어떤 사람 차례가 되었는데, 그도 역시 시편 23편을 낭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조용히 낭독만 했습니다. 앞에서 화려한 웅변술과 연기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던 내용을 조용히 낭독하자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끝까지 고요하게 낭독했습니다. 드디어 낭독이 끝났지만 고요한 낭독 때문인지 아무런 박수 소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감동적인 고요함이었습니다. 그때, 앞에서 낭독했던 배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그 시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목자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거짓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기교의 웅변력과 연기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매순간 뼈저리게 느끼고 감격하면서, 바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말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화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의 사랑, 우리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신랑되신 주님만을 사모하고, 그분 앞에 깨끗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결한 처녀”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도 주님 앞에서 “정결한 처녀”로 서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엄격하게 안식일을 준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등, 율법적으로 아무런 흠도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데 만족했을 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기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23).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신부가 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 부족한 것이 바로 ‘정의’와 ‘긍휼’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서기 위해서는 부단히 바르게 살려고 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으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부단히 자기를 쳐서 주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또한 2절에 보면,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라고 했습니다. 신부가 자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남편에게 드리는 것처럼,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신부가 자기 마음이나 몸으로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들은 모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주님께 드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그렇게 사모해야 합니다.

남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신부는 결혼식을 준비하며 그 신랑을 기다리는 것이 최대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날은, 주님이 오시기로 약속한 재림의 날입니다. 그날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여 결혼식을 올리는 날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2)

 

우리는 우리 주님과 연합하게 되는 그날에, 주님께 우리를 드리기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거룩한 신부, 순결한 신부입니다.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의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 61: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 주님은 헤아릴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은 결코 식어지거나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외면하고 떠남으로써 그의 사랑을 실망시켜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그의 사랑을 실망시켜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옷을 입고, 언제까지나 주님을 기다리며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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