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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환난에서도 오직 하나님

관리자 2014-03-23 (일) 11:00 10년전 1136  

환난에서도 오직 하나님

 

고후 1:8-11

 

이청준 원작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책이 1982년에 영화화되어 절찬리에 방영된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회의 문제아로 자라 중학교 교사가 된 안요한 씨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학교 교사로서 결혼해서 자녀도 있었으나 갑자기 두 눈이 다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의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곤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그는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슬픔을 당할 때 “어찌하여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면서 원망을 하거나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아무런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잘 극복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고통은 때로는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그 고통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안요한 목사도 갑자기 시각장애인이 되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고 맹인교회를 통해 시각장애인을 돕는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 동안을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막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였기에 그 무거운 시련을 겪고난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소아시아 지방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초대교회 시절에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하는 로마의 폭압정치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의 그 무서운 핍박을 견뎌내면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환난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각오해야 했고, 이교도들의 적대감과 관원들의 핍박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인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아주 센 바람이 불고 있다. 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이상 바람이 없는 곳이나 그냥 지나는 언덕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바울이 아테네에서 당한 고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후 1:8-9)

 

바울은 아시아에서 엄청난 환난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서신에도 이때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바울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같은 고통은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를 세우다가 당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주님이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마치 버림받은 사람처럼, 죽음 앞에 내 몰릴 정도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바울에게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신뢰하던 바울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그들을 이렇게 고생을 시키실까요?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큰 죄요, 가장 큰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닥친 불행한 일을 통해 무서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된다면, 그 불행은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가정은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답을 잃고, 그 충격으로 선친께서 무서운 병을 얻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 가정은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는 불행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병을 고쳐보려고 의원들과 좋은 약은 다 써보았지만 선친의 병은 깊어만 갔습니다. 절에도 찾아가 보고, 무당도 찾아가서 정성을 다 쏟았지만 나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부르시는 신호였습니다. 결국 우리 가정은 다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를 신뢰하였습니다. 나중에 우리 가족은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에 닥쳐 온 무서운 시련은 “오직 죽을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는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라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도 회개할 때 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만”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믿지 않고 다른 것을 겸하여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믿는 것이 우리의 생애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재물을 많이 모으고, 명예를 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아니 하나님만 믿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밖에 없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요(요 6:24),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모든 일은 주님을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이 죽을 병에 결렸을 때, 백부장은 예수께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마 8:7)고 하시니까, 그는 자기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니라.” (마 8:13)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이 있으면 그 무엇이든 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고후 1:10)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과거에 구원해주셨고, 현재도 건질 것이고, 미래에도 건져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확실히 믿는 자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비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에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구원해주셨으니까 현재와 미래에도 우리를 도와줄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36:1-26).

이 세상에서 큰 환란을 당하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은 현재와 미래에도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1서 5:4)

 

제가 지난번 시카고에 부흥회를 갔을 때 우리 교회 출신이신 전진희 집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미국에 가서 성공한 것을 보고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들 부부는 세탁소를 하면서 생활의 기반을 잡았고, 딸은 미국 검찰청의 검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을 보고 기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 집사의 남편은 우리나라에 있을 때 트럭 운전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대형사고가 났는데, 운전대 있는 곳만 빼놓고 그 트럭이 그냥 납작해져 버릴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분은 그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는데, 제가 그분에게 “이번 일은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당신을 살려주신 것은 당신을 쓰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뒤 수 십 년이 흘러서 지난여름 시카고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그 말을 했더니 “그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또 바울은 “너희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고 했습니다. 바울 같은 대(大)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3)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와 내 가정을 위해서 기도만 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그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바로 되어야 자기의 영혼이 잘되고, 자기 교회가 잘되고, 한국교회가 잘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같은 큰 사도도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1:11)라고 했는데,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합심기도를 말합니다. 두 세 사람의 합심기도도 좋은데 많은 사람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각 권사회의 기도가 있어야하고, 각 목장별로 합심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합심 기도로 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에는 꼭 능력이 따릅니다.

그런데 꼭 알아야 할 것은 기도 응답에는 감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으면서도 그냥 우연히 된 것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선의를 베푼 이에게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감사를 아는 이는 또 다른 선의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해 항상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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