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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너희는 나의 기쁨이라

관리자 2014-04-13 (일) 11:00 10년전 1158  

너희는 나의 기쁨이라

고후 2:1-4

 

금년 초에 유치원에서 카드가 하나 왔습니다. 저는 무슨 카드인가하고 열어 보았더니,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가 보낸 연하장이었습니다. 손녀의 사진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쓰여 있는 연하장을 보니 너무 귀엽고 예뻐서 식탁 옆에 걸어 놓았습니다. 저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녀, 손자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예쁘고 기쁩니다. 제가 들으니 엄마들이 아이에게 젖먹일 때 뿌듯하고 흐뭇하다고 합니다. 또 애기를 안고 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엄마들의 심정도 모르는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에 광고하기를 “시끄러우니 교회에 올 때에는 애기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광고를 놓고 애기 엄마들의 불평이 대단했는데, 결국 그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목회를 접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부모들을 위해서 11시 예배와 같은 시간에 ‘영아부’와 ‘유치부’ 예배를 따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젖먹이 아이들을 동반한 엄마들이 ‘자모실’에서 예배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아실에서 예배드리는 엄마들은 예배 인도자들은 잘 보지 않고 애기 얼굴만 본다고 합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 싸가지고 온 과자를 먹이는 할머니, 아이들끼리 싸우는 걸 말리는 엄마들로 그 방은 아주 분주합니다.

그런데 그 방에 있는 이들은 분주하지만 얼굴을 찡그리고 앉아있는 엄마들은 없습니다. 아주 명랑합니다. 사랑하는 자기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더 커서 유치원에 들어가면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쁩니까? 유치원에서 그림이라도 그려서 집에 가지고 오면 벽에다 붙여놓고 칭찬하기 바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대견하고 흐뭇해하는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받아쓰기 쪽지시험에 100점을 받는 날에는 천재가 아니냐고 야단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상장이라도 받아오면 동네방네 자랑하기 바쁩니다. 이렇게 자식들은 부모들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이란 책에 ‘자랑거리’라는 글이 있습니다.

“2세 때는 똥오줌을 가리는 게 자랑거리, 3세 때는 이가 나는 게 자랑거리, 12세 때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자랑거리, 18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20세 때는 사랑를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35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라고 합니다. 그 다음이 50세 인데, 재밌는 건 이때부터는 자랑거리가 거꾸로 된다는 것입니다.

“50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 60세 때는 아직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0세 때는 아직도 자동차를 운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5세 때는 친구들이 몇 명이라도 남아있다는 게 자랑거리, 80세 때는 아직도 이가 남아 있다는 게 자랑거리, 85세 때는 자기 손으로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라는 겁니다.

결국 인생이란 똥오줌을 가리는 걸로 시작해서, 똥오줌 가리는 걸로 마감한다는 이야기인데, 이처럼 우리의 삶은 별로 자랑할 것도 없고, 욕심 부릴 것도 없는 인생입니다. 다만 오늘 주어진 하루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감사하면서 산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우고 이룩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마치 자기의 자식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자식들 중에서도 부모의 속을 썩이는 자식이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어서 바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해상무역에 알맞은 최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고대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어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일찍부터 헬라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고린도는 로마에 의해 정복된 이후에도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주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서 마케도니아에서 분리되고,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지정되어 총독이 주재하면서 고린도는 옆에 있던 아테네를 앞질러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더욱 발돋움했으며 바울 당시에 그 번영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무역과 상업의 중심였던 고린도에는 많은 이방인들의 왕래하였고, 이에 따라 각종 이방종교도 몰려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역, 상업, 매춘 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사치는 절정에 이르렀으며 도덕적인 타락도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라는 이름은 헬라어의 '방탕함', '사치스러움', '성적인 문란함'과 같은 말의 어원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사치와 향락, 성적문란, 황제숭배,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찬 도시의 한복판에서 바울과 그 일행은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뒤 들려온 소식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이 세속적이고 문란한 로마의 문화와 우상종교의 영향을 받아 교회답지 않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책망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타락한 로마제국의 지배체제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워 놓았는데, 그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즉각적인 책망과 분노가 그들에게 너무 과격하고 파괴적으로 나타날까 두려워 부득불 방문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나의 기쁨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했는데 그의 책망이 너무 과격하게 나타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면서 방문을 미루었습니다. 비록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기만을 기다리는 바울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지만, 먼저 자신의 생각을 담은 권면의 편지를 먼저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희생으로 내주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렇게 건져주신 우리는 주님의 기쁨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고 주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기쁨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기쁨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까?

복음성가 중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써, 주님의 빛을 이 땅에 비추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기쁨으로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선교 128년밖에 되지 않은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교회가 주목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마치 고린도 교회처럼, 세상과 별로 구별되지도 않고, 오히려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의 세속적 가치관들이 침투해 오는 것을 방치하거나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주님의 교회답지 못하다’는 비판까지 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주님이 얼마나 괴로워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한국교회가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바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있기를 바라면서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 앞에 오늘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물질과 세상 것을 추구하고 살았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로서의 사명과 복음선교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 자신과 자기 가정만을 위해서 살았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기의 기쁨으로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불신앙적으로 살면 주님께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타락으로 얼마나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2:4)

바울은 자신의 기쁨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타락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전혀 회개하지도 않고, 영적으로 우둔해서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4-6)

 

바울은 망하는 길로 가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모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잘 책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책망보다는 사랑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눈물을 머금고 ‘책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대충 덮고 넘어가는 것이 더 큰 문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자녀를 키우는데 있어서 ‘회초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친구들과 한 밤중에 남의 밭에서 수박서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그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옷이 젖어서 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에게 한참 혼이 난 후, 저는 어머니에게 멱살을 잡혀서 그 수박밭의 주인집까지 끌려 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집 앞에서 “도둑놈 잡아왔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그 뒤 저와 친구들은 그런 짓을 다시는 안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한 것은 우리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마음이 담긴 책망은 자녀들의 인격 형성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책망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거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서에 나타난 바울의 목회적 과제는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인들을 대상으로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에 물들어 있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에 기초한, 전혀 다른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걸핏하면 바울을 오해하고 적대시 하는 상황에서, 바울은 그들을 로마제국의 시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때로는 ‘책망’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냉대와 질시에 대해서도 무조건 거부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책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다면 이방민족인 앗수르와 바벨론을 들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세우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믿지 않는 이들의 책망을 주님이 주시는 책망으로 여기고, 그동안 한국 교회가 세속적 가치관에 휩쓸려 값싼 은혜를 남발하면서 교회다운 모습을 잃어버렸음에 대해 회개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책망’은 아직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있는 복음’으로 돌아가 교회다운 모습과 그 기능을 회복하여 복음선교와 이웃사랑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9:24)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과 공의를 행하는 일에 헌신할 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주님의 기쁨’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한 가지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철저한 회개와 주를 향한 헌신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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