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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어떻게 헌신할까

관리자 2014-09-14 (일) 11:00 9년전 1235  

어떻게 헌신할까

고후 8:1-5

 

기독교 국제회의에서 어떤 세계적인 선교학자가 강의하면서 자기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출세하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겪은 경험 때문인데, 영국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사람들 중에 신앙이 좋은 가난한 집 자녀들을 데려다가 옥스퍼드 대학이나 캠프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시켜 박사까지 받게 하여 아프리카에 보내면 어떤 이는 대학교수도 되고, 총장도 되고, 장관도 되고, 어떤 이는 대통령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배신하여 믿음에서 떠난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고 신앙에 매달리다가도, 나중에 소원하던 일이 잘 되고 나름대로 성공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으로 압니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잘되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한편, 어려운 시련을 당할 때, 예를 들면, 사업이 기울어 가난해지거나, 갑작스럽게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될 때,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마저 원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련 중에 있을 때 욥처럼 감사와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얼마든지 물질의 형통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연단을 주시기도 하고 시련과 역경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건강, 장수, 물질의 형통은 환영하지만, 그와 반대의 것은 싫어합니다. 이런 것이 무섭고 쓰리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으면 그런 환난이 당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에게 갑자기 불치의 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업의 실패나 가정의 문제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 당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 어려운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인생의 파도는 언제 어떻게 우리의 삶을 덮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언제나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12)고 고백한 바울처럼 어떤 경우에도 신앙의 중심을 잡고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기근으로 큰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마게도니아 지방의 성도들이 헌금해서 도와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에는 심한 기근으로 인해 그곳 거주민들의 생활이 심히 궁핍해 있었습니다. 그곳에 위한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구제 헌금을 거두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영적인 구원의 문제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할 뿐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데 적극 나서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행 베푸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웃을 섬기는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5-17)

 

우리교회는 복음 선교를 위해 매월 선교헌금을 하면서 또한 구제헌금과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를 돕기 위한 돼지 저금통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 100일의 기적” 운동을 시작합니다. 예배 후 나눠 드리는 돼지 저금통에 매일 100원씩 저금하여, 12월 21일 성탄주일에 가져오셔서 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귀한 일에 꼭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가 나서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하라고 부탁하면서 마게도니야 지방의 교회들의 예를 말하였습니다. 마게도니아 지방의 교회란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통해 개척한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 교회는 정말 모범적인 교회였씁니다. 그 중에서 빌립보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했을 뿐 아니라 바울의 선교 활동을 위해서도 많은 헌금을 하였습니다(롬 15:26, 빌 4:15-16).

그런데, 이들 마게도니야 교회들은 경제적으로 풍성한 가운데 헌금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형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마게도니야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정치적으로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로마에게 수탈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도 로마의 황제 숭배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마저도 유대교인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아주 심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마게도니야 지방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지방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게도니야 지방의 교인들은 예루살렘의 형제들의 형편을 듣고 적극적으로 헌금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있던 마게도니야 지방의 교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헌금을 했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구원의 감격’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황제 숭배와 이방 종교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아가던 그들은 바울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까지 죄와 사망으로 버려진 자신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감격 때문에 그들은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야말로 진정한 신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는 척도입니다. 특히 주의 종들 가운데 이 감격이 없는 사람은 직업화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역을 하는 것 자체가 범죄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지금 그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환난과 핍박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구원의 감격을 가진 신자는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확실한 구원의 감격을 간직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마게도니아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2-3)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니야 교인들은 자기들도 환난을 당했으면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했는데 형편에 맞게 한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헌금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마게도니야 지방은 큰 내란이 휩쓸고 지나간 때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티베리우스 황제였는데, 로마 원로원에서 마게도니야 지방을 특별 재난지역으로 정하고 세금을 감면해 줄 정도였으니, 마게도니야 지역이 얼마나 살기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자기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연보였습니다. 흔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라고 하면 작은 액수의 헌금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말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거기서 말하는 ‘두 렙돈’은 그녀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이 과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격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마게도니야 지방의 교인들도 단순한 동정이나 구제를 위한 마음으로 헌금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으로 인하여 넘치도록, 힘에 지나도록 헌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5절)라고 했습니다. 이는 물질을 주께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주님과, 주님의 일에 전폭적으로 헌신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자기들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 자신을 물질과 함께 드리며, 전적인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그 무엇도 드릴 각오가 되어 있었고, 주님이 원하는 일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라도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인간적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그 귀한 아들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이는 곧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마게도니야 교인들도, 세계 교회의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당하는 기근의 소식을 듣고 그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헌신적으로 헌금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영국의 한 작은 마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이 끝나고 헌금을 드리는 시간이 되었는데, 마침 그날은 아프리카를 위해서 헌금을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영국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납치해 데려와서 많이 괴롭히고 핍박했는데, 그날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모두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가난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돈이 한 푼도 없던 그 어린이는 헌금 바구니가 바로 앞에 왔을 때 자기의 두 발을 헌금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이없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모두 웃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웃고 있던 그 순간에 그 어린이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돈이 없습니다. 대신 저를 드립니다. 저를 받아 주세요!” 이 어린이가 바로 아프리카 선교사요, 탐험가이며, 노예 해방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헌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헌금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헌금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금은 단순히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게도니아 성도들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 동참하는 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는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자 기쁨입니다.

에딘버러 대학의 의학교수였던 제임스 심프슨(1811-1870)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인 하와를 만든 장면을 읽으면서, 사람을 잠들게 하고 수술할 수 있는 마취제를 연구하여 발견했습니다. 의학계에서는 이러한 대발견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가 어느 학술 발표 자리에서 발표를 하고 있었을 때 한 교수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의 생애에 가장 뜻 깊고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들라고 하면 무엇입니까?” 모두들 그가 발견한 마취제일거라는 대답을 예상했으나, 심프슨은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생애에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주신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분에게 아까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마게도니야 교인들처럼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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