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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사람을 살리는 사람

관리자 2014-04-27 (일) 11:00 10년전 1302  

사람을 살리는 사람

고후 2:5-11

 

한 훌륭한 노인이 귀여운 외동딸의 간호를 받으면서 운명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밤이었는데 밖에는 거센 눈보라가 그 집을 날려 버릴 듯이 무섭게 불었습니다. 정성껏 아버지를 간호하던 딸은 아버지의 베개를 바로 해드리고, 싸늘해져가는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는 사랑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성경 말씀을 읽어드릴까요?”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 네 뜻이 기특하다. 그러나 나는 저 눈보라치는 모진 바람이 불기 전에 내 집을 반석 위에 지어 놓았다”는 말을 하면서 운명했습니다.

이 노인이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고 했는데, 이 “반석”은 베드로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선교 말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셔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기초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5-18)고 하셨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이 믿음 위에 선 교회가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하는 진리이기에 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교회가 섰고, 그 교회는 세계사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이끌어왔습니다.

영국의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말하기를, “현대 문명의 몰락을 구제하는 방책은 종교의 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고, 독일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말하기를 “교회가 만일 정치 도구로 이용되거나, 성직자들이 번뇌하는 인간을 신앙으로 위로하며 인도하는 직분을 버리고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면 그보다 더 비참한 때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1864-1920)도 “급격한 사회 변동기에 있어서 기독교가 살아있을 때는 그 사회가 안정될 수 있었지만, 만일 기독교가 부패해 버리면 그 사회는 혼란과 파괴를 면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나라의 흥망성쇠에 대해서 일반 국민들보다 그 책임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그 시대의 양심이었고 방향타였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살아있지 않으면 그 시대는 암흑시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권력이 세속정치를 지배하는 중세기를 암흑의 시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교회의 책임은 막중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마치 종교개혁 직전의 타락한 중세 교회를 보는 것 같아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일탈은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교인들도 세속의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세속에서나 있을만한 일들이 거룩해야 하는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대도시의 몇 몇 대형교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지방에 있는 중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모인 집단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의 집단이 그렇듯이 더럽고 추한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세 교회가 구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을 때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같은 개혁자들을 통해 교회가 세계사의 중심이 서게 해 주신 것처럼, 한국교회도 깨어있는 자들을 통해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두운 때일수록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하고 갱신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종교적인 우상숭배뿐 아니라 우상숭배에서 파생되는 도덕적인 범죄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시의 퇴폐적인 문화가 교회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더러운 것은 음란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변명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요, 양심의 자유이지, 더러운 죄에 몸을 담그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까지 자기들의 범죄를 합리화하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는 바울이 떠난 후, 그의 사도적 권위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무슨 생활비를 받으면서 고린도에서 그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그렇게 고생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 교회 성도 가운데 유력한 지도자가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2장 5절에서 “근심하게 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바울의 선교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준 바울의 대적자였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6절)라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교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이 사람에 대해서 벌을 내려 출교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큰 죄에 대해서 내리는 벌이 출교입니다. 출교는 교회의 자정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누가 죄를 졌으면 거기에 합당한 처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을 했는데도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그 교회가 자정능력이 없는 고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타락한 상태입니다.

언제나 교회는 자정능력이 필요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도 자정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한국 교회도 그렇지만 나라도 이러한 자정능력이 발휘되지 않아서 큰 문제입니다. ‘국정원 선거 개입사건’이나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근심하게 한 자”를 출교함으로써 자정능력을 발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출교 결정은 하였으나 아직 시행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출교 결정을 했으면 빨리 시행하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근심하게 한 자”를 이제 용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벌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뉘우치고 교회의 질서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회개했으니 출교처분을 내린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처분을 받은 것으로 교회 내에서 많은 비난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의 벌은 그에게 벌을 내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알게 하고, 회개하여 새롭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1918-2013)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정권의 흑인차별정책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26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나와 1994년에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탄압하고 감옥살이를 시킨,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던 백인 지도자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는 대신,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청산을 실시했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해 준 것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이야기하기를, 어떤 청년이 지나가다가 눈곱이 더덕더덕 묻은 지저분한 여인이 도와달라는 말을 외면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여인을 만났을 때 눈곱을 닦아달라는 말에 더러웠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깨끗하게 닦아주었더니 그 여인이 미인으로 변화였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그 여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평생을 그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실천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 초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양 도둑이 있었는데 양을 훔쳐간 사람에게는 이마에 양 도둑의 약자인 S.T.(Sheep thief)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일생 동안 다른 데 가서도 양 도둑질을 못하도록 하는 너무도 잔혹한 청교도적인 형벌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 양 도둑질을 해서 이마에 화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둘 중의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먼 곳으로 도망 다니면서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지난날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슬픈 사람이 있으면 며칠이라도 같이 있으면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점차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이마에 낙인을 찍는 풍속은 없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된 그 사람은 여전히 마을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어린 아이들은 그 할아버지 이마에 어째서 “S.T.” 라는 글씨가 붙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른들은 그 할아버지가 양도둑 이었다고 말하는 대신, 너무나도 그분이 거룩해서 성자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성자(쎄인트, Saint)라는 말의 약자도 “S.T.” 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도둑놈이 성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 20)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새로운 삶,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새로운 삶,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부활절 둘째주일에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의 범죄를 용서할 수 없어도 그 사람이 변하여 새롭게만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도 대다수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훌륭하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그릇된 행태는 한국교회 전체에 막대한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변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날마다 하나님 앞에 새롭게 되어 한국 교회가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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