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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교회의 일치

관리자 2015-09-27 (일) 11:00 8년전 1258  

교회의 일치

 

엡 4:4-6

 

세계 1차 대전 때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형제 같이 지내던 미군 세 명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전사당했습니다. 친구를 잃은 두 병사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두 친구는 개신교인이었지만 그 지역에는 성당밖에 찾을 수가 없어서 그곳을 찾아가 죽은 친구를 교회 묘지에 묻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당의 신부는 “우리 가톨릭에서는 개신교도를 가톨릭 묘지에 묻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두 병사는 그 친구의 시신을 교회 울타리 밖에 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쟁이 끝났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두 친구는 3년 후에 이곳에 묻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3년 후, 두 친구는 약속대로 친구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성당 울타리 앞에 있었던 친구의 무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그들은 혹시 성당에서 울타리 밖에 있는 무덤을 없애버린 것은 아닌가해서 사택에 있는 신부를 찾아가 항의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성당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덤은 울타리 안쪽에 있습니다. 얼마 전 성당에서 울타리를 넓히는 작업을 했는데, 그때 그 묘지도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무덤이 개신교도의 무덤인줄을 알았지만, 그래도 같이 예수님을 믿는 형제이기 때문에 저희 성당에서 그렇게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 성당의 신부들은 개신교인이든 가톨릭 교인이든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 울타리를 넓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 울타리를 얼마나 더 넓혀야 합니까? 우리 주님은 교회의 울타리를 어디까지 넓히라고 하십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땅 끝까지 울타리를 넓히라는 것인데, 아예 울타리를 없애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여기까지만”이라는 울타리를 스스로 쳐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 한계를 그어놓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유대인들은 그들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이방인들과 벽을 쌓고 멀리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교단, 자기 교파에만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자신만의 성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들고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 예수께서 계십니다. 거기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파로 나눠 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서로 벽을 쌓아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피를 통해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신 분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이 있다면 이는 진정으로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에베소교회에도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당시 매우 번창했던 이방 도시인 에베소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구성원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도 두 집단 간에 불화의 소지가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가 일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즉, 교회가 일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지만, 반대로 분쟁하고 분열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늘 분열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분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보수와 진보는 필요합니다. 이것은 수레에 있어서 두 바퀴와 같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정치계나 사회나 교회 그 어디도 보수와 진보가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보충해서, 건강한 정치,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적어도 교회만이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1. 교회는 한 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입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지만, 모두 머리의 통제에 따릅니다. 아무리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몸의 각 지체가 머리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움직여야 온전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런데 만일 몸의 지체들이 서로 분쟁한다면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분열과 분쟁이 있다면 온전한 교회를 이룰 수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면서 서로 연결이 되어 통일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5)

이것은 기계적인 통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체들이 머리와 연결되어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듯이, 교회 또한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으로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성령이 하나이기에 교회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pneuma)라고 하는데, ‘영’과 ‘숨’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숨’으로서의 성령을 생각해 봅시다.

일단, 숨이 끊어지면 몸은 죽습니다. 교회의 숨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는 교회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성령은 교회의 몸을 살게 하고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숨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어떤 젊은이가 교회에서 “성령을 받으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쉬지말고 기도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잠도 자야하는데,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그 목사님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청년은 성령을 받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를 알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어느 수도원의 원장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제가 성령을 받고 싶다고 하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원장이 대답하기를, “매일 기도를 하되, ‘주 예수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를 3,000번씩하고 일주일 후에 만납시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수도원 원장의 말대로 매일 실천했습니다. 그러는동안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주일 후에 원장을 만나자 이번에는 매일 6,000번씩 그런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또 일주일 뒤에는 매일 12,000번씩 하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렇게 평생동안 매일 12,000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훗날 위대한 영성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께 입과 마음과 정성이 하나가 되어 기도하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있는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3. 교회의 소망이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것이입니다. 물론 그 소망을 향해서 나가는데 있어서, 방법은 교회마다,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망이 같기 때문에 비록 방법론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서로 협력하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1885년에 우리나라에 개신교를 전파하기 위해 나란히 들어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로서 교단이 달랐지만, 서로 손을 잡고 이 땅의 복음전파 사역에 서로 협력했습니다. 다른 교단의 선교사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는 한국에 있는 각 교단의 소망이 하나였기에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교회의 소망은 같은 것입니다. 이 소망을 위해 오늘도 서로 다른 교회와 교단끼리 서로 연합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4. 교회는 한 분이신 주님을 섬깁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빌 2:11)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선교 목표는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날이 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로마황제를 “주님”(큐리오스, kurios)이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5. 하나의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인 신뢰와 항복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께 전적인 신뢰와 항복을 하는 이들은 그 분 안에서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전적인 신뢰를 할 수 있고, 그 분 앞에 항복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6. 하나의 세례가 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군에 입대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즉, 황제에게 영원히 신실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하게 초대 교회의 일원이 되는 세례 의식에서도 예수를 ‘나의 주’라고 공적으로 고백해야 했습니다.

제가 군목으로 있을 때 우리 부대장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예수를 믿기는 하겠는데, 어떻게 사병들과 함께 세례를 받겠느냐면서, 자기 사무실에서 혼자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안됩니다. 세례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가족과 사병을 앞에서 무릎 꿇고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서로 협력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7.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6)라고 했습니다. 이를 영어로 읽으면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above all, and through all, and in you all”입니다.

우주 가운데 참신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이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 뒤에 계시고 모든 것을 관통하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이 우주 안에 하나님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성도들은 하나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면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속 좁게 작은 일로 서로 분열하고 분쟁해서는 안됩니다. 분열과 분쟁을 일삼는 교인들이나 교회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한 분이신 주님,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어 온 세상을 복음화하는데 서로 손을 잡고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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