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거룩한 분노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5.11.08.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거룩한 분노

관리자 2015-11-08 (일) 11:00 8년전 1422  

거룩한 분노

엡 4:25-27

 

독립운동가인 안중근(1879-1910) 선생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안중근 선생도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안중근 선생은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간 안중근은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는 크게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907년에는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 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안중근도 여기에 동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니던 성당의 빌헬름(J. Wihelm) 신부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조선의 힘으로는 강력한 일본을 막아낼 수 없다”고 하면서 항일 운동을 하겠다는 안중근을 만류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느 날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과 가까운 ‘김진사’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대의 기개를 가지고 지금 이같이 나라 정세가 위태롭게 된 때에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려 하는가? 간도와 연해주는 조선인 100만명이 살고 있고 물산이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안중근은 간도와 연해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간도는 척박한 땅을 개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룬 곳으로 항일 정신이 투철했던 곳입니다. 안중근은 당시 간도에서 이름을 널리 떨치며 독립운동을 하던 김약연(1868~1942)이라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했던 그는 민족교육의 요람인 명동학교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며 명성이 자자했기에 안중근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김약연의 얼굴도 모른 채 소문만 듣고 간도를 찾아간 안중근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이 만났던 김진사였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고, 김약연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조선의 미래가 청년에게 달려 있다”고 격려하며 총과 탄환, 군자금 등을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드디어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6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안중근에게 총과 탄환, 군자금을 마련해 준 이는 김약연 목사였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사람을 죽이는데 협력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을 그렇게 괴롭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도록 했던 김약연은 의로운 분노를 했던 위대한 선각자였습니다. 이후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가톨릭신문 2008년 4월 13일 기사 중에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가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나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키워낸 김약연 목사야말로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키고, 정의의 하나님의의 뜻에 협력한 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중에는 빌헬름 신부처럼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그리스도인들이 불의한 세력에 항거하기 보다는, 권력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 권력자를 찬양하고 정당화하는데 앞장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아편”으로 만드는 처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향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라고 하면서 골리앗의 목을 베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분노’를 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민주주의 역사에 위대한 발자국을 남긴 영국의 정치가였습니다. 그에게는 최연소 총리에 오른 피트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둘은 영국 정치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피트는 총리로 20년 동안이나 영국정치를 이끌고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25세에 예수를 만나고는 세속적인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영적인 일에만 매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노예상인에서 회심한 존 뉴턴(John Newton)의 권면으로 그는 정치계에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존 뉴턴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사람입니다. 그때 뉴턴은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이 당신을 국가를 위해서 세웠다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하나님께 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으로 불의와 싸우는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윌버포스는 뉴턴의 권면을 받고 노예제도를 이슈화하여 뜻을 같이하는 세력을 결집해 나갔습니다. 그가 그 일을 시작하였을 때 영국의 국가재정의 1/3이 노예무역에서 얻은 수입이었기에 국회의원들의 항의와 노예무역에 관계하는 이들의 협박을 수없이 받으면서도 끝까지 노예무역폐지를 위해서 전 생을 걸어 결국 그 일을 시작한지 36년만인 1807년 노예무역폐지법이 통과되었고, 1833년 7월 26일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5일 후인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인 윌버포스는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힘없는 노예들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꼭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목사만이 하나님의 일이고 정치는 세속적인 일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던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하면 그것은 거룩한 일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만일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살 때, 비록 그 직분이 목사요, 장로요, 집사라고 할지라도 그는 세속적인 사람일 뿐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거룩한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발생할 때, ‘거룩한 분노’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의분으로 분노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번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분노를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막 3:2),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5)

여기서 예수께서 분노하신 것은 자신을 비난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불쌍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가지기 보다는 율법을 앞세워 자신들의 우월함을 내세우려고 하는 교만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자유케하고 행복하게 해야지 사람을 얽어매서는 안됩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본분을 망각한 종교는 분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분이 꼭 있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성미가 급하거나, 분노조절능력이 없어서 분노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인격의 문제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의분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새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 바울은 개인적인 분노를 품고 있지 말라고 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한 유대교 랍비는 기도할 때, “마음 속에 형제에게 악을 품지 말고 잠자리에 들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서로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꼭 화해하고 저녁을 맞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화해를 미루면 미룰수록 화해하기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마음 속에 화를 계속 품고 있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27절).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안됩니다. 말씀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분노의 감정이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와서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이 아닌 의분은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전에서 장사꾼들이 장사하는 것을 조장해서 뇌물을 챙기던 대제사장들에게 정면으로 맞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신 일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늘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만 보이셨던 예수님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5-17)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의분을 가져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각계 각층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의,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고 소외되도록 하는 가진 자들의 횡포와 이러한 사회구조를 고착화시키고자 역사까지도 서슴지 않고 왜곡하려는 세력들, 이밖에도 얼마나 많은 악한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지 모릅니다.

또한 신앙적으로도 우리는 의분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왜곡하고 가로막는 이단들과,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부 교회와 지도자들의 일탈행위에 대해서도 분노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스스로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거룩한 분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우리 앞에서 그 누구도 불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개인적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분을 품지 않도록 거룩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거룩한 분노와 겸손함을 동시에 겸비한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