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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살자

관리자 2015-09-20 (일) 11:00 8년전 1375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살자

엡 4:1-3

 

미국 오크우드 암 병원의 의사인 원종수씨는 세계적인 암 전문의입니다. 아마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분들이 많겠지만,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상이군인이셨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가난한 홀어머니 슬하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종수 선생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다녀 오시면서, 맹인 노인 거지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원 선생에게 그 노인을 씻어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거지 노인의 몸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났습니다. 온 몸은 시커먼 때로 가득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린 원종수는 너무 더럽고 냄새가 나서 도저히 씻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엄한 어머니의 말씀이라 어길 수가 없어서 억지로 씻어 드린 후, 새 옷을 갈아입히고 아침 식사까지 대접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가 열려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는 일류대학의 의과대학을 나온 후 미국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는데, 그가 어려서 그 노인 거지를 씻어준 것은 곧 주님을 씻어준 것이라는 감동과 함께, 하나님께서 “너의 평생에 먹고 사는 것을 책임지겠다”는 말씀을 하더랍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적 설명이 나오는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잘 대해준 사람은 영생을 얻고, 그들을 모른 척 한 사람은 영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그룹 모두 자기들이 언제 주님께 그렇게 했냐고 묻습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

그러자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잘 섬긴 것이며, 반면에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곧 주님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고 선언 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우리에게 가장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이웃을 도왔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주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고백과 결단이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행동 방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한 실천방안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그들 편을 들어주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안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 기도하고, 우리끼리 찬양하고, 우리끼리 교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정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하게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단체에 가입하려면 그곳에서 요구하는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그 본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단체에 방해거리가 되거나 불명예를 끼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 다워야 된다”는 말을 합니다. 교사는 교사 다워야 합니다. 학생은 학생 다워야 합니다. 의사는 의사 다워야 합니다. 군인은 군인 다워야 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 다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또한 그리스도인 다워야 합니다. 거기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고 본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거기에 합당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생, 교사, 의사, 군인, 경찰, 판사, 언론인, 정치인, 목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에 합당하지 않는 행동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갖춰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1. 바울은 여기에서 ‘겸손’, ‘온유’, ‘인내’, ‘사랑’, ‘평화’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겸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페이노프로수네(Tapeinophrosune)인데 이 말은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베질(Basil)이라는 사람은 “겸손은 모든 미덕을 담은 보석 상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겸손은 모든 미덕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미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이전의 고대사회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노예의 미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오히려 자기를 과시하고 드러내는 사람을 대우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겸손을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맨 앞에 놓았습니다. 이 겸손은 다른 미덕의 근거와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겸손은 자기 인식에서부터 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볼 때, 자기의 무가치함을 알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는, 어느 날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고 일을 마치려고 하는데, 예수께서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보았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놀라운 경험을 통해, 이 분이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서, 감히 그 앞에 설 수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그 다음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온유”입니다. 헬라어로 명사형은 ‘프라오테스’(praotes)이고 형용사는 ‘프라우스’(praus)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라오테스는 지나치게 노하는 것과 지나치게 노하지 않는 것의 중용”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온유”라는 것은 노할 때와 노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옆의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의분을 참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이 부당한 대우나 모독을 받을 때는 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평소 모습은 온유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과 그들에게 상납을 받아 재물을 쌓아가던 제사장들에 대해서는 화를 참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이들을 채찍으로 몰아내실 정도로 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를 체포하려고 온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는 대항하지 않고 무력하게 붙잡혀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처럼 온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해야 할 때는 노하지 않고, 엉뚱한 일에는 쉽게 화를 내곤 합니다. 힘 있는 자들의 불의와 인권침해, 거짓, 차별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다가, 자신의 이익에 조금만 손해가 나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냅니다.

우리는 나라와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분노할 수 있지만, 나의 유익에는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 속에서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단히 기도하고 신앙의 정진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3. 그 다음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오래 참음” 곧 “인내”입니다. 오래참음의 헬라어는 “마크로 투미아”(makro thumia)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는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말합니다. 로마사람들은 어떤 외국의 침입에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워 대 제국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순교자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 ‘환경’을 탓하기도 하고, 부모나 조상 혹은 남을 탓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젠가 승리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실패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승리의 기쁨이 주어질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4. 또 그 다음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에로스”(eros)인데, 이 말은 남녀간의 사랑으로 성적인 사랑이 포함된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필리아”(philia)인데, 따뜻한 애정으로 서로 매우 가깝고 매우 친한 사이의 사랑입니다.

3) 세 번째는 “스톨게”(storge)입니다. 이것은 가족 간의 애정을 말합니다.

4) 네 번째는 “아가페”(Agape)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자비” 혹은 “사랑”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비록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모독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친절 외에 어떤 감정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런 사랑은 인간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한 죄인들도 사랑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사랑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조금만 잘해주면 좋아하고, 나에게 조금만 소홀하게 대해도 싫어합니다. 이런 아가페의 사랑은 주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서 살 때 아가페의 거룩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을 주님께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5. 우리는 이상의 네 가지 미덕 즉 겸손, 온유, 인내, 사랑을 가질 때에 다섯 번째 미덕인 “평화”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 평화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평화는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간직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 부정’입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자기를 중심에 놓는 한, 평화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감정이나 위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평화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내려오시면서 장차 당하실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예수님을 만류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세상적인 승리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름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춰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바로 서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개인과, 한국교회에게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그리고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 중심에 언제나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또한 이웃이 있어야 하고 인류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제자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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