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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8.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오직 복음만이 살 길이다

관리자 2015-02-08 (일) 11:00 9년전 1264  

오직 복음만이 살 길이다

갈 1:6-10

 

사람이 휘두르는 무기 중에서 가장 흉측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탄을 가리켜 ‘반대자’라고 합니다. 사탄은 타락한 이후로 줄곧 하나님의 일에 반대하고, 신앙인들에 대해서 반대하고, 사사건건 비난합니다.

얼마 전 말레이시아의 항공사인 ‘에어 아시아’가 실종되었는데,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한국인 선교사 가족 3명이 함께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잃은 선교사 가족을 위로는 못할망정, 기독교인을 무조건 반대하는 비난성 댓글이 난무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부터 130여 년 전에, 가난한 우리나라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의료, 학원 선교 등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생명을 바쳤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정신문명이 발전될 수 있었는데, 그들을 비난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희생과 봉사, 섬김을 오해하고 무조건 반대와 비난을 일삼는 일부 네티즌과 안티 기독교인들은 맨 정신이 아닌 듯 합니다.

 

두 번째로, 인간이 휘두르는 흉측한 무기는 ‘왜곡 모방’입니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모방합니다. 사탄이 인간을 처음 타락시킨 사건도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유혹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유혹했던 왔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표와 방향은 전혀 다른 왜곡 모방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냈을 때, 사탄은 바로의 마술사들에게 그런 이적을 흉내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이단들이 마치 기독교인 것처럼 모방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왜곡시켜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이비 이단들의 왜곡 모방은 반윤리적이며 반사회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의 피해는 기독교 내부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지난번 유병언의 ‘구원파 사건’과 같이 엄청난 해악을 끼치기도 합니다.

사탄의 세 번째 무기는 ‘무고(誣告)’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사탄을 “무고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the accuser)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사탄은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들을 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들이 휘두르는 이러한 무기에 의해 고통 당하는 때가 많습니다. 바울도 그의 선교 일생을 통해, 이와같은 흉측한 무기들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갈라디아 지방에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남부 갈라디아 주의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매우 성공적인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그곳에 유대주의자들이 침투하여 그들의 믿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아직 확고한 신앙으로 성장하지 못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2차, 3차 전도 여행에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를 방문하여, 그 교회들을 든든히 다져놓으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힌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하더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구원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일 뿐이며,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킴으로써 만이 구원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들의 말을 듣고 너무나도 쉽게 바울의 복음을 버리고, 율법으로 회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변절 소식을 접한 바울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믿음의 손상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엄히 대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급박한 위기의식은 그의 말에도 묻어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이어서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했는데(6절), 칼빈은 여기에 “속히”라는 표현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복음을 버렸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즉, 끝까지 거짓 진리에 대항하며 사수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떠나”(6절)라는 표현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인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진리에 끝까지 대항하다가 여력이 부족하여 그것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쿠테타를 일으키듯이 진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떠나”라는 단어는 현재완료 시제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떠나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떠났을 뿐 아니라, 열심히 거짓 진리를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던 이들은 거짓 진리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언제나 진리를 배척하는 속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실로 인간은 타락이후,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훼방하며, 악을 일삼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이런 죄악된 본능을 한탄하며,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3년 동안이나 주님과 동행하며 동고동락(同苦同樂)했는데도, 예수님을 은 30냥을 받고 팔아먹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쉽게 주님을 배반하고, 비진리를 따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연약합니다. 죄의 유혹 앞에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 복음 진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우리는 여기서 복음이 무엇이기에 복음을 떠나면 안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그의 몸을 내어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일 가운데 가장 큰 사건입니다. 그래서 “복된 소식” 곧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받은 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선물을 받고도 마음에 별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화인 맞은 영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D. L. 무디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그의 피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피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가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죽음과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도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이것 외에 다른 내용을 덧붙이면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율법을 덧붙여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도 능력이 있다고 덧붙여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그렇게 복음을 변경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실제로 이단들은 처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하는 것 같이 성경을 들먹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점차 성경에 없는 내용을 덧붙입니다. 그리고는 점차 성경을 벗어나고, 자신들의 교주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약하고, 믿음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짓 교훈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이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는 ‘포퓰리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비난을 들었던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선 유대인, 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에 대한 할례를 적극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거기에다 할례든 뭐든, 단 1%도 다른 것을 섞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단 0.1%라도 ‘다른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인정하게 된다면,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0.1%의 다른 것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믿음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할례’ 문제에 대해 전혀 양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 인류 사회를 평화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남북통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이 예수의 복음으로만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에 평화가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거기에 다른 것을 섞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이 강조한 ‘할례’ 대신 부와 권력과 명예를 거기에 끼워 넣으려고 합니다. 믿음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상은 ‘다른 것’을 추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한국교회 문제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만을 붙들고,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을 위해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거기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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