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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5.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그리스도인의 흔적

관리자 2015-02-15 (일) 11:00 9년전 1285  

그리스도인의 흔적

갈 1:11-24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속에서 나방이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누에고치를 칼로 잘라서 나방이 편히 나오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밖으로 나온 그 나방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나방들은 스스로 누에고치를 헤치고 나오자마자 훨훨 날아갔는데, 도움을 받아 쉽게 나온 나방은 쓰러져 일어나지를 못하고 곧 죽어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하도 이상해서 곤충학자를 찾아가, “내가 도와줘서 편하게 나온 나방은 왜 힘없이 죽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곤충학자는 말하기를, “나방은 누에고치에서 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날개에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쉽게 누에고치에서 나오게 되면 날개에 힘이 없어 곧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생존 방법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도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처럼, 우리에게 닥쳐오는 환난, 시련, 고통, 고난을 통하여 더욱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역을 위해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었던 바울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연단과 시련의 시간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지루하지만,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흔적이 됩니다. 특히 주님의 거룩한 일 때문에 받은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큰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섬기며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아예 바울은 ‘고난의 모델’로 부름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 주님을 섬기는 길이 이렇게 무서운 고난만 받는 길이라면 그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주님을 위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의 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그런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 유대교에 헌신했을 때 어떠했는지, 다메섹에서 어떻게 극적으로 주님을 만났는지,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언급하면서,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3-14)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심히” “지나치게 믿어” “더욱 열심” 같은 용어를 썼는데, 이는 자신이 유대교의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정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박해하였던 지난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 또한, 유대교 시절의 자기의 그릇된 열심처럼 어리석은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 당시 유대교에는 두 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샴마이 학파’였고, 또 하나는 ‘힐렐학파’였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유대 율법을 엄격하게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을 주장하는 보수파였습니다. 이에 반해 힐렐학파는 율법해석에 온건한 입장을 취했는데, 안식일이나 이혼 등에 대해 자유롭고 온건한 견해를 보였습니다. 당시 힐렐 학파의 수장은 힐렐의 손자인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당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이며, 산해드린 공회원이고 헤롯대왕의 종교문제 조언자로서, 당시 유대교의 정신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며 일반적인 존칭인 '랍비'(나의 선생)보다 더 높은 "랍반"(우리의 선생)이라는 호칭을 유대 역사상 처음으로 부여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런 가말리엘의 수제자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으로 보면 일류대학의 법대를 나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명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 사회의 지도층인사가 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데 그 뛰어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데 사용하다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요즘 ‘갑의 횡포’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데,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것은 대부분 못 배운 사람들 보다는, 많이 배운 사람들의 그릇된 인격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득권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바울은 그런 ‘지식인의 횡포’와 ‘기득권층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흔드는 ‘예수파’를 아예 뿌리 뽑으려고 작정을 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체포하는 권세를 대제사장으로부터 얻어 가지고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무릇 종교인이란 그 종교를 믿으며, 사회적으로는 이웃에게 유익한 생활을 해야 하는데,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열정을 빌미로 믿는 자를 해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선두에 서는 것도 모자라, 지역마다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을 박멸하고자 군사까지 데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처절할 정도로 교회를 박해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비록 율법과 유대교 신앙에 정통한 학자였지만, 정작 기독교 복음에는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자였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적인 눈이 ‘비늘’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또한 그 눈에 ‘비늘’이 씌여져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아나니아에게 기도를 받을 때, 눈에서 이 ‘비늘’이 떨어지더니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를 볼 줄 아는, 복음이 이해되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영안이 닫힌 분이 있습니까? 아직도 복음이 믿어지지 않고, 주님을 위한 헌신이 없는 것은, 아직도 우리 눈에 ‘비늘’이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 비늘이 벗겨져 영안이 열렸던 것처럼, 이 시간에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깨달아짐으로써 영안이 열리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중세기 초기에 활동했던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믿음의 부모를 떠나 술과 여자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정원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집어들고 읽어라”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어거스틴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벤치에 놓여있는 성경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어 들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로마서 13:13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 13:13)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읽고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그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어지지 않던 예수가 믿어질 뿐 아니라, 자기의 방탕했던 생활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즉시로 자신의 방탕했던 삶을 다 청산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삶을 청산하고, 말씀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7). 바울은 먼저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이 사막은 다메섹과 연결되어 있는 사막이었는데, 바울은 거기서 3년 동안이나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학문과 지위와 명예 등 세상적인 것을 모두 뒤로하고,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 광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람이 되려고 하면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위대한 종으로써 나설 수가 있었던 것은 아라비아 사막의 3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인고의 세월이 있었고, 엘리야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의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깊은 산, 조용한 골방에서 세속의 때를 벗고 주의 능력을 힘입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자신의 소명에 대해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종으로 나서겠다고 보고하고 사도들과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 1:18-19).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사도들의 허락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신 소명에 대해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 관계를 넓히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의 유대교 신자들은 바울이 못마땅했습니다. 전에는 유대교에 충성하던 자가 어느날 갑자기 기독교인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 찍고 핍박할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바울은 예루살렘에 단 15일만 머물면서 자신의 용무를 마치고는, 서둘러 자신의 고향인 다소를 거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어차피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지체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이르자 그곳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놀라워했습니다. 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열혈 유대교 학자가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다니니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곧 바울의 변화가 진정한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갈 1:21-24)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자신처럼 유대교에 물들어 이방인 선교를 폄하하고 핍박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고 선교 사역을 감당해 온 것은, 예전에 자기처럼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고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고난과 핍박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흔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고난이 따릅니다. 그 고난이 그리스도인의 흔적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흔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까? 이 고난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 창시자 칼빈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육체의 고난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하다가 추방되어, 작은 시골 교회 목사로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되었던지 “사탄을 따르는 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만 주의 종은 푸대접을 받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는 피로와 영양부족으로 말미암아 폐병, 위장병, 심장병, 신경쇠약, 치질, 두통 등 중병을 앓았습니다. 그는 5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8,90세 노인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저술, 강연, 목회 등으로 건강을 돌보지 못하는 그에게 하루는 그의 제자들이 휴식을 가질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자 칼빈은 “왜 자네들은 나의 태만한 모습을 주님께 보여주려고 하는가? 나는 일하다가 죽기를 원하네”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의 생명까지 바치셨는데, 우리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겪는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영광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주님 앞에,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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