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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성령의 근심

관리자 2015-11-22 (일) 11:00 8년전 1356  

성령의 근심

엡 4:28-30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집에서 혼자 자치기 연습을 하는데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어머니는 저에게 그런 놀이를 용납하지 않고 집안일이나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어머니가 집에서 30리나 떨어진 시내에 가셨기 때문에, 숨겨 놓았던 자치기 막대를 꺼내어 집 마당에서 열심히 자치기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집에는 마침 늙으신 외할머니가 와 계셨는데 제가 노는 것을 보시고는, “너 그러다가 엄마한테 혼난다. 가서 공부나 해라”고 타이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할머니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치기 연습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집에 암탉이 여러 마리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계란을 제일 많이 낳는 씨암탉이 제가 실수로 날려 보낸 막대기에 맞아 기절을 한 것입니다. 그 암탉은 우리 집 암탉 중에 계란도 많이 낳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계란 크기도 크고 맛도 있어서, 우리 어머니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암탉이었습니다. 그런 암탉이 제가 날려보낸 막대기에 머리를 맞아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는 과거에 우리 어머니가 병든 닭을 볏짚 재에 묻는 것이 생각나서 그 암탉을 재에 묻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살아날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그 닭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외할머니가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외할머니가 저에게 한 말씀하셨습니다. “너, 앞으로 내 말을 잘 들으면 네 어미에게 말하지 않겠다. 만일 말 안 들으면 알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제일 무서웠는데, 외할머니가 말만 잘 들으면 어머니께 말하지 않겠다니 너무 고마웠습니다.

드디어 날이 저물어 갈 때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저는 시치미를 떼고 어머니에게 “누가 우리 암탉을 머리를 때려 죽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저를 의심하시는지, 저를 노려보시는 것입니다. 그때 외할머니가 나서서 “우리는 누가 죽였는지 모른다”고 저를 거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눈을 찡긋 거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어머니는 무섭지 않은데 외할머니가 무서워졌습니다. 외할머니가 저를 보시기만 해도 그만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저와 단둘이 있을 때마다, “너 그렇게 하면 네 어미에게 다 말한다”고 위협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어찌 무섭고 불안한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무슨 말씀만 하셔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하루하루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저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이든 살리든 말씀드려야지 마음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때 어머니께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제 날벼락이 떨어지겠지’하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다 들으신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네가 자치기를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네가 언제 용서를 비는가 두고 보고 있었다. 됐다. 이제 조심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인자하신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외할머니를 봐도 무섭거나 불안하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보호자로서,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는 책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다리기도 하고, 마음 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면서 뉘우치지도 않는다고 하면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근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우리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대청소도 하고, 집안 자녀들도 예절에 따라 예를 표하게 합니다. 개까지도 짖지 못하게 합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에 와 계시는 성령님을 잘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의 마음에 맞춰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그 마음을 맞춰 드릴 수 있습니까? 먼저 바울은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다시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도둑질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대의 대도시에서는 항구에서와 대중목욕탕에서 도둑질이 횡행하였습니다. 특히 목욕하기 위해서 벗어놓은 옷가지나 소유물에 손을 대는 일이 많았습니다.

칼빈은 여기서 말하는 ‘도둑질’이 “모든 종류의 부당한 착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의 판단으로 정죄할 수 없는 사소한 도적질까지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즉 실제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의 것이 아닌 것을 정당하지 않게 차지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도둑질이 있습니다. 유형의 재산 뿐만 아니라, 지적재산권이나 저작권, 특허권, 상표권, 영업비밀 같은 무형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도용하는 것도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도둑질은 하나님 것에 대한 도둑질일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헌금은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를 침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현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십일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폐기하신 율법을 근거로 십일조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당하다도 하면서 예수를 믿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율법이 있기 전부터 십일조는 존재하였습니다. 창세기 14장 17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전쟁을 통하여 전리품을 가지고 오다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그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 시초입니다. 그 후 그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분깃이 되었고, 그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는데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교회에서 십일조를 통해 교회 재정을 확보하려고 하고, 십일조를 통해 왜곡된 축복관을 심어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십일조 자체를 부인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십일조 정신을 살려서 예배와 고아와 과부와 장애인을 위해 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십일조를 하는 사람에 대한 축복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십일조의 복을 약속하시면서, “하늘 문을 열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너희 포도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마치 주식투자를 잘하면 배당을 많이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10절에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온전한 신앙을 말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세상 만물의 주인으로 그리고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한 신앙을 가진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지켜주시겠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투자해서 배당금을 많이 챙기라는 그런 천박한 말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내가 쓰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이 십일조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예배와 구제와 봉사를 위해서 써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것과 이웃의 것에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권면에서 그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물질관과 노동관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물질을 버는데, 그 목적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궁핍한 이웃을 돕는 선한 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필요하다면 재물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서 필리핀 ‘나눔선교센타’에 파견한 구근효 선교사가, 그곳에서 어린이들에게 전도하여, 약 45명이 아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데 45명이 어린이들이 진지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눔선교센타를 세우기 위해 거금을 드린 성도님도 있고, 매월 선교헌금을 드리는 성도님들도 있는데, 그러한 헌금이 그렇게 대단하게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새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 대해 권면하면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더러운 말”은 “부패한” 혹은 “썩은”이라는 의미로 단순히 좋지 않은 언어가 아니라 악의 있는 험담과 중상모략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말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말들이 얼마나 횡행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언어생활에서도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한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해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평화를 만들고 하나가 되게 하고 연합이 되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만일에 교회나 세상에서 덕을 해치는 말만 일삼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근심하실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을 어기고 곁길로 간다면 부모님이 얼마나 섭섭해 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안내와 지도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성령님께서는 근심하시면서 탄식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 때문에 근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 때문에 기뻐하시게 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성령께서 기뻐하시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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