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8.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예수 앞에 나올 때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0.04.18.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예수 앞에 나올 때

관리자 2010-04-18 (일) 11:00 14년전 1417  

예수 앞에 나올 때

 

요한복음 7:1-13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작가 라게르크비스트가 쓴 [바라바]에 보면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켜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 중에 살인까지 한 흉악한 사람이었습니다(막15:7).

사형을 집행할 날 흉악범인 그는 석방되고 죄와 상관이 없는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진 예수를 멀리서 조심스럽게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중에 “저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강한 의문을 품고 고뇌하던 바라바는 자신을 대신해 죽은 사람이 인류의 메시야임을 마침내 깨닫고 당시 로마 방화사건에 스스로 연루되어 예수처럼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자기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는 강한 영적 부담감으로 괴로워하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을 찾아 로마 방화사건에 관계가 없었으나 로마 당국이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때 기꺼이 그 책임을 도맡았습니다.

바라바는 그 책임을 지면서 십자가의 고난 저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부활의 영광에 감격하여 쓰라린 고통을 달게 받았습니다.

작가 라게르크비스트는 탁월한 상상력으로 바야바의 회개와 믿음과 순교를 생생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저 바라바 같은 죄인이지만 예수를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40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앞으로 몇 가지 행사를 통해서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는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최후의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6개월 전 쯤 초막절이라는 유대의 3대 명절에 많은 사람이 모인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도 형인 예수와 예루살렘에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형제들과 제자들과 나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형제들이 예수를 불신했습니다.

 

예수는 형제들과 함께 자랐고 예수를 어렸을 때부터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예수의 교훈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족이 되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어떤 사물을 너무 눈 가까이에 두면 그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듯이, 예수와 너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본래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제자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교훈하는 것을 들으면서 비웃었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며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7:3-4).

이 말은 당신이 메시야라면 촌구석인 갈릴리에서 활동하지 말고 대도시인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라고 하는 충고입니다. 이는 형 예수를 조롱한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형으로서 자신들과 똑같이 한 명의 인간인데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생각하며 조롱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다음에는 예수의 신성을 믿었습니다. 이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당시 그들은 예수를 인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인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자신들과 동일한 성품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예수를 오로지 ‘인간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한 결과입니다. 오로지 예수를 ‘아래로부터’만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아래로부터만 예수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제국주의 로마를 무너뜨릴 ‘혁명가’입니다.

예수는 당시 정치권력인 헤롯과 로마 그리고 종교권력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반대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혁명가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오로지 혁명가로만 보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입니다. 예수는 분명 혁명가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성경 여기 저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는 그 당시 권력자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정치, 종교 권력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권력을 이용해 사회적인 약자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의 혁명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이렇게 혁명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를 인간적으로, 아래로부터만 이해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신적으로,’ ‘위로부터’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신적으로, 위로부터 보았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유일한 구세주요 메시야입니다.

예수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추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 둘을 종합해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둘을 아울러서 신앙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형제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자고 했지만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유대 남자는 3대 명절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데도 예수는 같이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조롱하는 형제들과 같아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인류 구원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사역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은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이면 심지어 가족도 마다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는 복음 사역을 제일로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런 의도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기독교를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이 이 말씀을 읽으면 예수가 가족의 화평을 방해하는 분으로 여겨져, 이 말씀이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의 말씀이 맞는지 의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

예수께서 가족들 사이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신 이유는 예수께서 가족을 사랑하시지 않아서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제도가 여성신학자들이 말하는 가부장적인 제도라서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정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복음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가장 중요하기에 만일 가족 사이의 친분이 그 복음 사역을 거스른다면 읍참마속(泣斬馬謖)하는 심정으로 가족보다는 하나님의 복음을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존재 의미가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가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구원역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가족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은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역사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형제들과도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2. 예수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사람을 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이상의 분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는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조금치도 거짓이나 허위도 과장도 없는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절하며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하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랍비나 바리새인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청년도 예수를 이와 같이 존경하는 마음에서 ‘선한 선생님’이라고 높여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이 예수를 그들과 같이 불러 준 것은 예수를 높인 것이지만 실상 랍비나 바리새인들은 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부자 청년은 ‘선한 선생님’의 뜻을 잘 모르고 사용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다음에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옹립해 예수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똘똘 뭉쳐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이런 생각과 예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는 이런 백성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정복자의 길을 버리고 고난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발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너무나 겸손하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을 부려 먹을 수 있는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예수는 정말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세상의 상식적인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또한 예수는 용기 있는 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의 원수들이 분명히 붙잡아 사형시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예루살렘에 용기 있게 올라갔습니다.

그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권세가 많아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히 나아갔습니다.

최고의 권력자들인 로마의 빌라도 총독과 헤롯대왕 그리고 종교 권력자인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너무나 당당한 예수의 모습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하늘과 땅이 두려워할 인격이 스며 들어 있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선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분과 영적인 교제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와 가까이 더 가까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가까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3년 동안 따라 다닌 후 결론적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에 대한 우리 인간의 고백 가운데 가장 위대한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로마군 백부장은 그 사형집행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질 때까지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며 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사형집행관이 사형을 집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슴 뛰는 삶]이라는 책에서 강헌구 교수는 “물은 99도에서는 절대로 끓지 않는다고 한다. 정확히 100도가 되어야 끓는다고 한다” 물을 수증기로 바꿔놓는 것은 그 결정적인 1도입니다.

100도가 임계점입니다. 세상 모든 물질에는 이러한 임계점이 있고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계점을 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서두르지 말고 일정한 양을 채울 때 놀라운 상승효과가 발생합니다.

예수가 고난이 십자가상에서 그 극에 달했을 때 인류 구원은 그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이 예수로 말미암아 물이 수증기로 변하듯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미국인들이 대통령을 평가하는 몇 가지 기준들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느 가문 출신인가? 둘째, 어느 학교 출신인가? 셋째, 경제력은 어느 정도인가? 넷째, 부인의 지성과 인격은 어떤가? 등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이 평가 기준에 가장 잘 맞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사람이 존 F. 케네디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가톨릭 명문가의 태생이었고, 지금까지도 일류대학으로 꼽히는 하버드 대학을 나왔으며, 재벌가의 아들로 정치자금을 충분히 활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부인 재클린은 어떤 대통령의 부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성과 매력을 겸비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위의 평가 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 대통령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중학교는 고사하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주경야독의 독학생이었던 그에게서 대학이라는 빛나는 상아탑의 권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완벽한 조건을 갖춘 존 F. 케네디보다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더 많은 인기와 존경을 얻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미국인들은 모든 조건을 갖춘 케네디보다 링컨을 더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일까요? 전기 작가들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링컨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충실히 배우고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그리스도를 닮은 대통령, 그가 바로 아브라함 링컨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처럼 우리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이 주신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생명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강남교회 40주년을 맞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짊어지고 예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전도와 세계 선교에 헌신하고 이웃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 한국의 수많은 교회의 모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