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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1.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예수 안에서의 자유

관리자 2015-03-01 (일) 11:00 9년전 1275  

예수 안에서의 자유

갈 2:1-5

 

로마 시대 이후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1800년대 중반에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군대가 유대인 마을을 모조리 습격하여 살육하고 불을 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위급한 상황에서 엠마 라자루스(Emma Lazarus)라고 하는 한 소녀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였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문학적 소질이 뛰어나서 유명한 시인이자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소녀 시절 겪었던 불행한 경험을 평생 잊지 않고,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세상 사람들에게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을 널리 알렸습니다.

엠마 라자루스(Emma Lazarus, 1849~1887)가 러시아에서의 박해와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을 위하여 1883년에 “새로운 거상”(New Colossus)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가 “자유의 여신상”의 받침대에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은 1886년 10월 28일에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프랑스에서 우호증진을 위해 기증하여 뉴욕의 리버티 섬에 세워졌습니다. 이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엠마 라자루스도 총칼에 쫓기고 불길 속에서 살아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유의 여신상의 제막식 날 너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처지였던 그녀는 끝내 제막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결국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의 받침대에 새겨진 그녀의 시는 지금까지도 자유와 해방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거상(New Colossus)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유로이 숨쉬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너의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사람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 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올릴 터이니”

 

그런데, 저는 이 시를 읽노라면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였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엠마 라자루스의 시가 새겨진 ‘자유의 여신상’이 비록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웅변해주고 있지만, 오늘날 화려한 자본주의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는 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억압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안은 아메리칸 드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자유와 안식을 찾는 이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영원한 자유와 해방이 있습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낸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영원한 자유와 해방이 있음을 깨닫고,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든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정통 유대교인이었으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은 반드시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엄격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 대한 정죄하면서 그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의 구원은 율법 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 그는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지한 자들이 죄의 사슬에 얽매여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음을 들고 소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신앙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굳게 믿다가 예수를 믿게 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할례와 율법은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할례와 율법을 등한히 하고 예수의 복음만 증거하는데 큰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선민의식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곳마다, 이들의 방해는 실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라도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나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할례와 율법을 인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할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특권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신앙 안에서 그러한 차별의식을 묵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통한 자유를 다시 율법의 종교로 되돌리고자 하는 자들을 ‘거짓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경계하였습니다. 이들은 복음의 진정한 자유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가졌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유를 얻었는데 어찌 다시 종의 멍에를 멜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예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 값이 사해졌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정죄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모든 율법으로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많은 고행과 섬김의 생활을 했지만, 죄에 눌려 그의 영혼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 영원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 말씀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된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당시 로마 가톨릭의 억눌림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를 전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러나 그 자유는 방종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의 영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적인 삶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들었나이다”(마 15:22)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원주민을 멸시 천대하며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가난한 과부로서 신분적으로도 매우 천한 여인이었는데, 딸까지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께 나오면 나음을 받을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지만, 결국 그 여인은 확고한 믿음을 통해 그의 딸이 고침 받고 어엿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운명적이고 저주스런 삶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저주스러운 가난이 수천 년 동안 대물림되어 내려 왔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들어 가난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가난을 극복한 것이 어떤 대통령 한 사람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그 대통령을 반신반인으로 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탁월한 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물불 안가리며 뛰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것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와 수 천 년에 걸쳐 이어지던 저주스런 가난의 쇠사슬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바로 되는 것 또한 예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제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인간적인 연약함과 부족함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데서 비롯된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이 도덕적인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의 구조적인 죄악도 예수 안에서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사회 구조적인 죄악에 의해서 사람들이 억압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구조적인 죄악은 개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을 통해서 구조적인 죄악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많은 이방 민족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사들을 통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페르시아의 고레스 임금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과거에 동구권이 사회주의의 억압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폴란드의 한 노동자를 통해서 자유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는 레흐 바웬사(1943~ )였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바웬사는 직업학교를 나온 뒤, 조선소의 전기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재주도 없었고, 가문이나 학식도 별 것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고 한 사람의 가장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동조합 활동에 참가하며, 눌림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서슴지 않고 대변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힘은 예수에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루어 냈고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되어 역사의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국권이 강탈된 채 36년 동안 정말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독립을 위해서 일본에 항거하는 3.1운동은 바웬사 같은 외침이었습니다. 이런 독립을 향한 외침과 열망을 통해 1945년, 우리 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와 해방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정신이 한국교회에서 사라진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몰되어, 하나님을 향한 헌신도, 이웃을 위한 희생정신도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신앙적 타락에서 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가 있다는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운명적인 저주와, 구조적인 사회악의 쇠사슬에서 자유를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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