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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6.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빛 가운데로 행하라

관리자 2015-12-06 (일) 11:00 8년전 1364  

빛 가운데로 행하라

엡 5:8-14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인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신앙이 훌륭했던 어머니 모니카의 지도를 받으며 자라났지만, 하나님을 외면하고 방황과 혼돈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밀라노로 건너가 암브로스 주교를 만나 그의 설교를 통해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된 어거스틴은 훗날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기독교 역사에 빛이 될 만한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의 생활을 ‘어둠 가운데 사는 생활’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는 생활을 ‘빛 가운데 사는 생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어둠”(darkness)이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빛”(light) 혹은 “빛의 자녀들”(children of light)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가져다 준 빛에 대해서, 그리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여기서 빛의 열매에 대한 설명은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상기시킵니다. 마치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을 받은 벼들이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풍성하게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는 다름 아니라, ‘착함’(goodness)과 ‘의로움’(righteousness)과 ‘진실함’(truth)입니다.

먼저 ‘착함’(goodness)은 일종의 관대한 정신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온유하고 도덕적인 성품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윤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윤리적인 것이 다 신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의 삶은 윤리적이어야 합니다. 종종 신앙은 윤리를 뛰어 넘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비윤리적 행태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얄팍한 인격을 포장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도 신앙인의 윤리적인 삶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또한 ‘의로움’(righteousness)은 원래 법정용어인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흠도 없이 떳떳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며, 공정(公正)하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의로워지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진실함’(truth)을 가리키는 용어는 ‘객관적인 진리, 사실, 진실, 참됨’이라는 의미로, 복음서에는 주로 ‘진리’로 번역되어 예수님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요 1:14)이며, “진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요1:17).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진리로 해야 한다”(요 4:23)고도 했으며,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되는데 그 진리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고 했습니다(요 8:32).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 진리가 빛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단순한 지식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그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데, 그것은 마치 태양 아래에서 모든 동식물이 에너지를 공급받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은 태양빛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나무는 태양빛을 받지 못하면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지 않으면 열매 없는 삶이 되고 맙니다. 열매 없는 삶은 그가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은 허무한 인생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예수님도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 안에 거하며 예수와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유용한 사람으로 설 것입니다.

 

또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동기와 모든 행위를 그리스도의 빛에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3).

옛날에는 시장에서 무슨 비단이나 그릇을 살 때, 그 물건을 햇빛에 비춰 보곤 했습니다. 햇빛에 비추어 보면,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흠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중고차를 살 때도 밝은 빛 아래서 자세히 살펴 보는데, 그러면 외관에 흠이 있거나 덧칠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모든 생각과 결심, 그리고 행동을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빛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그냥 내 지식과 경험만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가는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 행동하기 십상이고, 그것으로 이웃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개인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죄악을 세상에 폭로하게 합니다.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가 아무리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미화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면 그 추악한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부정과 불의와 죄악을 빛 가운데로 끌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악은 어둠 가운데서 끊임없이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백주의 태양 빛 아래 드러나게하면, 그것을 끝장내 버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교회를 깨끗하게 하고,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빛 아래 드러내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타락한 중세 교회의 불의와 부정부패를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만천하에 폭로함으로써, 기세등등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제동을 걸고, 개신교 교회가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이 세상에 유익한 존재로 우뚝 서도록 하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도 지식인들 중에는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이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개혁은커녕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러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탄압할 시간만 벌어주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그러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대안제시와 하나님의 음성을 원했습니다.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시대 사람들의 그러한 갈망을 채워주는 신적인 외침이었습니다. 루터는 신앙적 열정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겨버리고, 복음의 실체를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독일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은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북부 유럽 지방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16세기 내내 전 유럽은 대변혁에 휩쓸렸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 운동으로 중세유럽은 교황청의 압력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되었고, 이것은 문예부흥과 함께 자연과학의 발달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신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져, 세계는 엄청난 변화가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 개혁은 겉으로 보면, 인간의 움직임 같았으나,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호소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빛으로 중세교회를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청소를 할 때 창문을 열고 햇빛을 비추어 겹겹이 쌓여있는 먼지와 온갖 더러운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을 통해 어둠에 빠져 있던 교회에 빛을 비추고, 교회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또한, 루터가 하나님의 빛으로 교회와 역사를 본 것처럼, 하나님의 빛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빛 앞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과 한국교회의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다 드러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빛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더럽고 추한 것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깨끗하게 하기도 합니다. 실상 햇빛을 쏘이면 많은 질병이 정복될 수 있다고 합니다. 햇빛 속의 자외선, 적외선, 가시광선은 모든 생명활동의 근원이라고 해서, 어떤 의사들은 일광욕으로 대부분의 현대병이 개선된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햇빛이 가지고 있는 치유력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약 햇빛이 없어지면 미생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생명체는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를들어, 어떤 과학자들이 원숭이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햇빛이 차단된 상태에서 살게 한 원숭이들이 대부분 구루병에 걸려 죽어갔다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사람이 햇빛을 쐬지 않으면 비타민 D가 부족하여 각종 병에 노출되어 제대로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유럽처럼 일조량이 많지 않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햇빛만 나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일광욕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햇빛은 우리의 건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빛도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드러내는 고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와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도 깨끗하게 하고 아픈 곳을 치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 이러한 시 한 귀절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이 시는 초대교회의 찬송가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것 같은 불신앙에서 하나님께 나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으로 새롭게 출발하자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모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 주 앞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라는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그 빛으로 새롭게 일어나,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고 위대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물리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다 몰아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빛을 통해 생명력이 회복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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