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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0.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메시야를 맞을 준비

관리자 2015-12-20 (일) 11:00 8년전 1320  

메시야를 맞을 준비

막 1:1-8

 

세계적인 대학인 에모리 대학의 프레드 크레독 교수(Fred Craddock)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을 가끔씩 간증하곤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주방에서 아버지 때문에 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고 합니다. 가끔 마을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에게 교회에 함께 나가자고 권면하면, “당신들은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손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하면서 빈정거리거나 모욕을 줘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크레독의 아버지는 신앙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배려해 주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부유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좋아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곤 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창피하고 안타까워서 그렇게 자주 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레독의 아버지가 후두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급격히 쇠약해져서,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건강할 때는 그렇게 기고만장하여 자신의 지위와 재물을 자랑하던 아버지는 이제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크레독이 병실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종이에 자신의 심정을 글로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정말 잘못 살았구나. 내가 자랑하던 것들은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구나. 난 정말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너무 후회스럽다.” 그 글을 읽은 어머니와 크레독은 아버지의 인생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끝나서야 되겠습니까? 인생을 정리하는 순간이 다가올 때 이렇게 후회만 가득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하고 살 만할 때는 전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의 허무한 인생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건강할 때, 먹고 살만한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힘껏 감당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11월에, 우리 교회에서 역대 여신도회 총회장들과 함께 강원도 용평으로 아웃리치를 다녀왔습니다. 역대 여신도회 총회장들은 지난 30년 동안 교회를 위해서 정말 헌신적으로 봉사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던 권사님들은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족한 자신이 여신도 총회장을 맡아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스러웠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섬김의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더 열심히 섬길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때 그 일을 한 것이 너무 잘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교회 다니는 분들 중에는 예수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만 생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나서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멍에’ 앞에서 주저합니다. 자기 자신의 멍에만해도 힘에 부치고 고달픈데, 거기다가 ‘예수님의 멍에’까지 메라고 하니,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멍에’를 실제로 짊어져 보면,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이 자신의 짐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짐 위에다 예수님의 짐을 얹을 생각을 하니까 부담스럽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각자의 짐을 내려놓고 나서, 예수님의 짐을 메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 짐을 메게 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에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짊어진 ‘예수님의 멍에’는 세상에서 허무하고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어떤 인생의 짐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주님의 값진 짐도 넉넉히 멜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이야기 나누었던 권사님들이 바로 이런 것을 체험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우리의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값진 삶을 살 수 있게 하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를 위해 이미 오신,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지를 세례 요한의 모습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활동하던 세례 요한에게는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약 7백년 앞선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세례 요한의 활동을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막 1:2-3, 참고. 사 40:3)

2절에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사자”(messenger)라고 하였는데, 이 “사자”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앙겔로스’(angelos)라고 했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란 뜻의 ‘앙겔로스’에서 영어의 ‘천사’를 가리키는 ‘엔젤’(angel)이 유래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말은 ‘심부름꾼’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심부름꾼’으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모두가 이 땅에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심부름꾼’이 심부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일에만 신경쓰고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심부름꾼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우리는 모두 ‘보냄 받은 자’입니다. ‘보냄 받은 자’는 ‘보내신 목적’에 따라 ‘보내신 분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몇 가지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인데, ‘마음을 바꾼다. 원통히 여긴다. 뉘우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말만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행동까지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그 회개는 거짓이거나 불완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죄악된 세상을 향해 걸어가던 우리의 발걸음을 완전히 돌이켜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음과 행동을 돌이키지 않으면 죄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 길은 파멸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소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귀족 청년이 자기 숙모 집에 머물다가 그 집에서 일하던 카츄사라는 순진한 여자를 유혹하여 그녀의 순결을 짓밟았습니다. 그 귀족 청년이 떠난 후 카츄사는 임신 사실이 알려져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오갈 데가 없게 된 카츄사는 결국 매춘부로 살아가다가, 살인강도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법정에 들어선 판사가 바로, 과거에 카츄샤의 신세를 망쳐버렸던 그 귀족 청년이었습니다. 카추샤를 보고 놀란 그 판사는 자신의 일시적인 죄악으로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놓은 것을 깊이 반성하고, 그녀의 석방을 위해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그녀는 유배지인 시베리아로 떠나게 되었고, 그 판사도 시베리아까지 따라갔으나 헛되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는 무섭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마음과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또한 예수님을 최고로 높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면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 1:7)고 했습니다. 그 당시 세례요한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 존경과 주목을 받았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5)

그런 세례요한이 예수님 앞에서는 신발끈을 풀어주는 노예만도 못하다고 한 말은 예수님의 존귀하심을 찬양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런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우리를 위해 오신 주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눔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는 무리에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것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나눔이야말로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실제적인 준비입니다.

우리 고향에 한 여고생이 자기의 도시락을 그 마을 혼자 사는 가난하고 병든 할아버지에게 3년 동안이나 드린 것이 나중에 사람들에게 알려져 지역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나눔의 실천은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참된 의미, 즉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나눔의 실천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10여년 전부터 크리스마스 헌금을 전액을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세례요한이 말한대로, 성탄절에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위에 있는 이웃들과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서 뜻 깊은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말 분위기에 들뜬 세상 사람들처럼 감상적인 성탄절을 맞이해서는 안됩니다. 성탄절의 핵심은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주님을 높여드리고 나눔의 생활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탄절은 주님을 만나는 뜻 깊은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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