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영원한 승리자
요한복음 6:60-65절
어떤 장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감탄할 만큼 죽은 사람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해서 주위의 인정을 받는 소문난 장의사였습니다.
그 장의사는 늘 열쇠가 채워진 까만 장부를 가지고 다녔는데 많은 사람이 그 까만 장부에 무엇이 기록되었는지 궁금했고 그 장부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의사는 장례를 진행하다가 심장마비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슬픔을 같이하고 모두가 안타까워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 그의 미망인이 그 까만 장부를 꺼내 읽었습니다. 그 장부에는 “1920년 4월 17일 아무개가 혼자됨. 그 다음 날은 누가 혼자됨.....”이라고 끝없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장례를 치를 때 혼자되신 분들을 기록해 두었다가 매년 크리스마스 때 카드와 선물을 보내서 위로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을 염려했고 배려했고 돌보았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장의사로 일하면서 50년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그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애석하다고 혀를 차고 있었습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장의사의 의미 있는 삶을 기억했습니다. 그 만큼 그 장의사의 남을 배려하는 삶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이 세상을 한번 사는데, 그러면 그 단 한번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의미있고, 보람 있고, 가치있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에 대한 긴 설교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하고 실망하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급기야 말다툼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은 “피를 마시지 말라”(레17:10-14)는 구약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상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를 유대를 구원할 메시야로 생각했는데, 무슨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부활 승천에 대한 예언입니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큰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1.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증명합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은 먼 동방에서 이상한 별을 보고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고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말한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 가운데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들입니까? 실상 유한한 인간은 부활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영역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길과 방법은 결코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면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일종의 특별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길과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동방박사와 목자처럼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예수의 말씀을 믿고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은 한번 죽으면 살수 없습니다. 더욱이 무덤에 묻혔다가 무덤을 열고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열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에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그렇습니다. 예수는 그의 부활로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위세를 만방에 널리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을 거역한 죄로 세오졸프를 체포하여 파리탑의 높은 감옥 속에 감금하여 버렸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그는 황제의 위의를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하며 나아갔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 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 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흰옷 입은 천사 돌을 옮겼고 누우셨던 곳은 비어 있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 권세 모두 이기시었네“(찬송가 165장).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자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찬송소리는 감옥 탑을 뚫고 나와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영혼에 큰 충격과 가책을 주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행렬을 세우고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빌고 세오졸프를 석방하여 신앙의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가 메시야, 즉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부활로 인해 예수는 ‘유일한’ 그리스도로 확증되었습니다. 이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망 권세를 모두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활의 승리의 기쁨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만이 가치있는 삶입니다.
인간이란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 영원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영원한 저주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에 우리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심령이 부패한 사람들이 영적인 진리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다시 말해 돈의 노예가 되어 양심을 팔고 믿음까지도 버립니다. 개인들 사이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 간에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개인들 사이에서도, 국가 사이에서도 온갖 끔찍한 악행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도대체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을까 반문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정의로운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이 죄악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죄악된 인간을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영영 버림받아 전혀 희망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부터 가치 있는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의 땅이 혼돈스럽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광명의 빛이 들어와 우리가 살 만한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던 것처럼 죄악된 사람에게 예수가 들어오면 그 사람의 심령에서 말씀이 역사하여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어도 예수를 믿으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공의 척도는 세상의 부와 명예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가 주는 영적인 생명을 소유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입니다.
대형 여객선이 인도양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갑판에서 애완용 개와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개는 소년이 공을 던지면 쏜살같이 달려가 공을 물어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던진 공이 크게 튀어 바다에 빠졌습니다. 개는 주인이 던진 공을 물어오기 위해서 파도가 높은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소년은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멈추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개 한 마리 때문에 배를 멈출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이 바다로 뛰어 들었습니다. 선장은 할 수 없이 배를 멈추었습니다. 개 때문에 배를 멈출 수가 없지만 사람이 죽게 생겼기 때문에 거대한 여객선이 항로를 바꾸어 정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아담 이후 죄인으로 버려졌으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음과 멸망의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최고의 성공이요 세상에서 사는 행복입니다.
이렇게 고마우신 예수를 세상 만민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고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이라고 전해야 합니다.
오는 5월 9일 총동원 주일에는 반드시 두 명 이상씩 전도하여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구나 충성스럽게 실천해야만 하는 예수의 ‘지상명령’입니다.
3. 예수를 아무나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성적인 힘만으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한 주권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한 주권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사고로서 대단히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그분께 달려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조선시대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과거 중세의 사람들은 민주적인 사고에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수백년 동안 내려온 ‘전통’에 의지하여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으로서의 삶에 익숙한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삶에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현대의 우리는 민주주의 원리에 익숙해져서 중세의 전통중심적인 삶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진취적이고, 자발적이고, 자립적이고, 혁신적인 사고에 익숙한 우리는 주인으로서의 삶에 익숙하고 종으로서의 삶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주인이 되려고 하지 종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인생을 책임지는 지는 것은 ‘나’지, 그 어떤 ‘전통’이나 ‘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만약 그들이 ‘종’이 되기를 강요하는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있다면 그것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그들을 ‘주인’으로 만드는 것들이라면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기독교에 반감을 갖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생명의 주권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익숙한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여졌듯이,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한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미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미련한 것으로 진리를 삼고 있습니다. 예수의 무력한 죽음을 보여주는 십자가에서 우리는 위대한 승리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현대의 이성적인 사람들이 다 미련하고 무식한 것이라고 혹평하는 것 속에서 우리는 최고로 값진 하나님의 사랑과 영적인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영생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돈입니다. 만일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지난 1997년 IMF 관리체제 때나 작년의 경제 위기에 경제적인 실패가 가정의 해체로 이어져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진 가정이 많습니다.
지하철역 지하도에 추위 속에 떨면서 잠을 자는 노숙자들, 이들이 돈이 없어 그 모양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물질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질 때문에 체면도 인간의 도리도 다 팽개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이고 영혼의 양식입니다.
영적인 생명인 영생이 없으면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적인 진리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적대하기까지 합니다.
산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절)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일 뿐 다른 그 누구도 없습니다.
또한 그의 말씀 속에 생명의 영과 생명의 힘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큰 저주입니다.
저는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음성이 꿀송이 같이 달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와서 졸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아기를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이도 있습니다. 빨리 끝나서 가고 싶어 시계만 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아 큰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여 최고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는 참된 메시야로 확증되었고, 우리는 그 생명에 오로지 믿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뜻 깊은 부활절을 맞아 부활의 이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생명의 기쁨을 함께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