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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하나님의 은혜

관리자 2015-07-12 (일) 11:00 8년전 1291  

하나님의 은혜

엡 1:1-2

 

미국의 유명한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의 총장인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는 유명한 신학자요 사상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찾아와서 딸을 사랑하니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기 딸의 성격이 괴팍스럽기 짝이 없어서 그 누구와 어울려 살기가 힘들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찾아 온 청년이 준수하고 조건도 좋아서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선뜻 허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타일렀습니다.

“나는 이 결혼을 허락할 수 없네. 자네가 내 딸을 아직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내 딸은 자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네.” 하지만 그 청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저는 따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따님도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청년의 단호함에 속으로 놀라면서도 그 청년에게 “글쎄, 내 딸과 자네는 여러 가지로 조건이 맞지 않는 것 같네. 이만 포기하게.”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무슨 조건입니까? 따님은 크리스찬입니다. 그 이상의 자격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인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청년의 말에 조나단 에드워드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깨닫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거나 단지 운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행운아야” “나는 행운을 타고 났어”라고 하거나 혹은 반대로 “나는 왜 이리도 운이 없을까? 도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운이 있네, 없네’, ‘재수가 좋네, 나쁘네’ 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 그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오늘도 주님이 나와 동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길을 인도하실 겁니다” “나의 이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서 어떤 말을 자주 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의 입술에 ‘믿음의 말’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본래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인 스데반을 즉결심판으로 처형하는데 앞장섰고,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는 각처로 숨어 있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박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대제사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다메섹까지 원정을 떠났던 포악한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가장 큰 적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바울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전혀 뜻밖의 선택”은 바울의 그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지식이나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런 조건들 때문에 더욱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바울을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바울은 언제나 자기 같은 핍박자요 폭행자였던 악한 자를 사도로 택해 주신 것을 감격했습니다. 그의 이 감격은 ‘일회용 감격’이 아니라, ‘평생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마다 맨 처음 구절에서 이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고전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골 1:1)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시고 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격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다 내가 해낸 것이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해냈다고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 같은 부족한 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다’고 고백하면서 언제나 놀라워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감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표현합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절)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있는 곳, 곧 소속된 곳을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에베소”라고 하는 지리적인 장소요,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하는 영적인 장소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육신적으로는 세상에, 영적으로는 하늘에 주소를 두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두 개의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이 땅의 주소를 가지고 있고,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곧 하늘에 주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이 땅위의 삶’만을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두 개의 주소’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고원지대에서 아주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비결이 무엇인지 묻곤 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다에서 항해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항구에 매어 두는 것이 나의 비결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떠내려 가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평온의 비결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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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화가가 무서운 풍랑 속에서 조난당할 위기에 있는 배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그 배는 많은 사람들을 태운 채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침몰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지르거나, 구조를 요청하거나,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이어야 하는데, 모두가 여유가 있고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배의 키를 잡고 항해하는 선장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인생의 키를 맡기면, 아무리 거센 풍랑이 몰려와 배가 침몰 직전에 있더라도 걱정 근심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한 것은, 스스로를 ‘독자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소유’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초기 선교사들도 이런 의식을 분명히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우리나라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히려 희생과 순교를 각오하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세상적 가치관에 따라 살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이 가난한 땅에, 아무런 세상적 보상도 얻을 수 없는 곳에 와서 평생을 복음 전도하면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주님의 마음을 읽고 순종하여 ‘은둔의 땅, 코리아’에 와서, 이 땅에 복음을 전하여, 이 나라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 말은 가령, ‘원정을 위해 보낸 함대’라든지, 그의 조국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대사’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특별한 임무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자기가 맡은 봉사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포스톨로스’는 당시 최고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온 유대사회와 이방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서신으로 전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명은 서신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실행되는 것도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이런 ‘아포스톨로스’는 산헤드린의 대리자였기에 그가 가진 권위는 전적으로 산헤드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주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땅에 파견된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로 말미암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이런 능력과 권위가 따랐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서 세상에 나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우리에게도 놀라운 표적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를 들어서 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자, 주님의 손에 붙잡힌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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