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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1.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옛 생활을 벗어 버리라

관리자 2015-11-01 (일) 11:00 8년전 1339  

옛 생활을 벗어 버리라

엡 4:17-24

 

1970년대 초부터 5.16 군사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을 실시하면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였는데, 그때 일본에서 해외 이전을 모색하던 공해산업을 많이 들여왔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하던 교회 앞에도 그런 중화학 공장이 들어와 있었는데, 수천 명의 직원이 종사하는 큰 공장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런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취직을 잘한 축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어떤 부장이 그의 아내의 인도로 제가 담임하던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 겸손하고 착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예의를 다하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교회에서 세례교육도 받고 세례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는 날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일날 집에 들어오지 않고 외박을 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어떻게 세례를 받는 날 외박을 할 수 있느냐며 야단이 났습니다. 그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정말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그 회사 부장급들이 그가 교회에서 세례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한다는 핑계로 술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술자리는 2차, 3차까지 이어졌고, 모두 외박을 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하는 그 분의 아내를 잘 달래어 돌려보냈지만, 지금까지도 제 목회사역 가운데 그렇게 황당한 일이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답게 새로워져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경험도 있습니다. 제가 군목을 할 때였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옆 부대에서 합동세례식이 있었는데, 그 부대의 연대장도 그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은 1월 첫 주일이었습니다. 전방의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한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육군 대령이었던 그 연대장은 세례를 받기 위해 특별한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그날 새벽에 부대 뒤편에 있는 산에 올라가,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호수의 얼음을 깨고 그 속에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서 10분 동안을 있다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그렇게 온 몸이 빨갛게 되도록 추운 물속에 있으면서, 지난날을 회개하고 새롭게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저는 그의 소감을 들으면서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감동은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그 후 육군 중장이 되어 군단장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앞서 말한 어느 회사의 부장과 군부대의 연대장, 이 두 분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그럭저럭 신앙을 이어가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두 가지 중에 어디에 해당합니까? 혹시 지금까지 옛 생활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이라도 바로 오늘 이 시간이 신앙의 대 전환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시아 7교회 중의 하나인 에베소 교회가 위치한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로 로마제국의 행정,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다른 대도시처럼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심취되고 이방 종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시민들은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났지만,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복음을 전했는데, 특히 3차 여행 때는 이곳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임하여 방언과 예언을 하는 등,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행전에는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행 19:17) 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에베소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이어 초대교회의 3대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로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살던 사람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복음이 없으면 그들은 가능성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복음이 있으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에베소 교인들처럼 복음으로 말미암아 축복받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축복받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더욱 철저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요구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신앙적 불완전함을 개선해야 했는데, 바울은 첫째로 이방종교에 빠져 살았던 때에 몸에 배어 있던 낡은 생활양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생활 양식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비록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이지만, 바울은 이방인의 생활양식을 용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지난날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단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교도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무지로 인하여 마음이 어둠에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단어가 나오는데, “마음이 굳어졌다”(엡 4:18)라는 말입니다.

“굳어진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프로시스(prosis)입니다. 원래 대리석보다 더 좋은 돌을 말하는 프로스(pr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이 말에는 의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관절 등에 생겨 동작을 마비시키는 통풍석을 의미합니다. 또한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는 자리에 생기는 뼈로 본래의 뼈보다 더 굳은 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단단한 뼈는 감각능력을 상실해버립니다. 이렇게 굳은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굳은 마음”은 심령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이방신 신자들 가운데 아직도 이방의 풍습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마음이 굳어진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생명이 있는 것은 부드러운 반면에, 생명이 떠나면 굳어집니다. 베어진 나무도 뻣뻣하게 굳어지고, 동물도 죽으면 몸이 굳어집니다. 이처럼 마음이 굳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이 민감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방탕한 생활을 정리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라고 했습니다.

“방탕”은 헬라어로 아셀게이아(aselgeia)인데 플라톤은 이를 “몰염치한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방탕”은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방탕한 자는 염치도 체면도 없고, 수치심도 없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생들이 차를 타면, 어른 앞에서 그냥 의자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연로하신 분 앞에서도 다 앉아있습니다. 참으로 염치도 없습니다.

또 요즘은 모든 매체와 문화가 성적욕망을 부추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보니까, 공공장소에서 낯 뜨거운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대중문화의 선정성은 이미 도를 넘었습니다. 이런 것은 다 짐승같은 짓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지도층 가운데 윤리적 일탈행동으로 법적인 조치를 받는 경우가 더욱 증가하였지만, 도무지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으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못한 것, 우리가 주께 헌신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모양이든지 방탕한 생활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더러운 욕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더러운 욕심을 헬라어로는 “플레오넥시아”(Pleonexia)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오만한 탐욕’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기꺼이 남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악한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사람마다 이 “플레오넥시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땅과 재물과 노예를 약탈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인류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짓밟고자 하는 “플레오넥시아”가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기에, 도둑질도 하고, 사기도 치고, 남의 순결도 짓밟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부정부패도 저지르고,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을 하지만, 인간의 마음에 “플레오넥시아”가 있기에, 인간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간질을 하거나, 중상모략을 하거나 하는 이들은 모두 “더러운 욕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처럼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해가 되는지 알면서도 올바르지 못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다면 이 또한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더러운 것에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늘 거룩하고 구별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결론에서 바울은 인간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에 속한 옛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굳은 마음과 방탕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진리 안에서 바르고 구별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민감하고, 부끄러운 세속적인 성공들을 다 버리고,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사람, 새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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