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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6.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영적인 축복

관리자 2015-09-06 (일) 11:00 8년전 1284  

영적인 축복

엡 3:14-19

 

얼마 전에 어떤 시각 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수필을 읽었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예쁜 부인과 귀여운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부모님이 물려준 많은 유산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여유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 봐도 행복하고 부러운 삶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켠에는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들 제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아쉬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저에게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나는 예쁜 아내를 보고 싶은데,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재롱부리는 모습도 보고 싶은데, 아이들의 얼굴도 본 일이 없습니다. 또 해마다 봄이 되면 봄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뿐, 내게는 단 한 번도 봄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눈부신’ 태양도, ‘푸른’ 바다와 하늘과 산도, 나는 볼 수 없었습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은, 단 한번만 이라도 눈을 떠서, 아이들이 웃는 것을 보고, 내 아내의 예쁜 얼굴도 보고, 태양이 얼마나 눈부신지, 하늘과 산과 바다가 얼마나 푸른지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면, 지금 눈을 감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사람의 수필집을 읽고, 나의 삶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가족들의 얼굴이나 산과 하늘을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데, 저는 매일 가족들의 얼굴도 볼 수 있고, 언제든지 산과 하늘도 볼 수 있으면서도, 그것이 소중한 지도 몰랐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도 못했습니다. 매일 매일 소중한 사람들을,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살면서도, 지금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제 자신이 너무나도 메마른 삶을 살아온 것 같아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소중한 오늘 하루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 하루를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의 소중함도, 아름다움도 깨닫지 못하고, 때로는 무관심하게,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정말 마음이 메마르고 무딘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삶을 살 수 있는지 모릅니다.

실상 우리는 두 눈을 뜨고 사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오늘 하루를 더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오히려 모자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의 감정은 너무나 메말라있고, 하나님 앞에 생의 환희와 감격과 감사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생의 환희와 감격과 감사를 회복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영광을 통해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이란 하나님의 완전성과 충만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 완전성과 충만성은, 바로 앞 구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서 만물의 이름을 수여해 주시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15)

즉, 만물에게 이름을 주셔서 의미있게 하시고, 만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충만하심이, 그리스도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속사람도 강건케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속사람”이란 인간의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한 마음을 말하는데, 그것은 오로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식을 많이 쌓거나, 운동을 많이 하거나, 오랫동안 수양을 하면 속사람이 변화되거나 강건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유치원 때부터 근 20년 동안을 학교에 다닙니다. 그 후로는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직장과 사업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과 치열한 투쟁을 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성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또한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은 육체의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또 인격 수양을 통해서 다소나마 인격적으로도 성숙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식을 쌓는 것도, 체력을 단련하는 것도, 인격을 수양하는 것도,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제한적인 효과만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나 고통이 찾아오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도 없어집니다. 오로지 완전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는,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저 또한 바라기는 이 성령이 우리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들 가운데, 시각장애인인 양정신 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7살 때, 고열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양정신은 부모 조차도 아무 쓸데가 없다고 포기하였지만, 한 전도사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여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한 후, 맹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여 맹인 최초 여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저희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녀는 “이 어두움을 바치리이다”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그녀의 책을 읽은 사형수가 자기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자기 두 눈을 양정신 선생에게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양 선생님은 그것을 사양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증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두 눈을 잃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께 감사한 것 밖에 없어서, 굳이 눈을 뜨는데 연연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로 양정신 선생님은 일평생 인천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시다가 귀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녀의 그러한 삶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환하게 바라보는 분이었고, 그 누구보다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또한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시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와 계셔야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는 사람이 어찌 영적으로 강건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도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만약 우리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만 하면, 아무리 인생의 고난 한 가운데 있게 되더라도, 세상에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런데,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이기적 마음에는 오시지 않습니다.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당시 에베소는 로마 제국의 중심도시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첨병과도 같았고,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지식을 많이 추구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아무리 세상적인 지식을 많이 겸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어떤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식에 넘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제한적인 지식으로는 광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통해 체득한 ‘인격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깨달아지는 실천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에 사랑과 감사와 같은 실천적인 삶이 없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속사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영적인 성장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령 안에서, 감사와 사랑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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