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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 사람

관리자 2015-03-15 (일) 11:00 9년전 2802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 사람

갈 2:18-21

 

1513년,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었는데, 그는 사치가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를들면, 그는 표범과 어릿광대, 애완용 흰 코끼리 등 호화로운 일행을 대동하고 로마 시내를 행진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이를 위해 교황청 재산의 1/4을 쓸 정도로 낭비벽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런 레오 10세는 자신의 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성베드로 대성당을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는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십자군 원정 때부터 교회의 재정 수입을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하였던,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

면죄부란 쉽게 말해서 천국행 티켓이었습니다. 교회에 돈을 주고 이것을 사면, 돌아가신 부모님도 죄가 사해져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짓을 하는 교황의 잘못을 지적하고 일어난 운동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었고, 이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때 루터는 법률가를 꿈꾸던 청년이었으나,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약대로 수도원에 들어가 엄격한 규율과 금식과 고행을 수행하며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로마에 가서 ‘스칼라 산타’(Scala Santa)라는 성스러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내리기도 수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행생활을 통해서도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가 더 커지는 등, 영적인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를 지켜본 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대학에서 성경학 교수가 되어, 더욱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루터 당시의 사람들은 구원이 개인의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순례나 고행, 성자 숭배 및 성물 숭배 등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곧바로 미신적 행위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를 줄여준다는 면죄부가 유행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은 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데 혈안이었습니다.

루터 또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대로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죄책감만 더욱 커지자 이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만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절의 말씀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깊이 연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교회에 대한 복종이나, 선행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으로 타락한 로마 교회를 보고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마침 순회 설교자인 테첼이 면죄부를 판매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본 루터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면죄부는 단지 로마 교황청의 돈벌이 수단일 뿐이며, 죄에 대해 슬퍼하거나 회개할 기회를 박탈하는 비신앙적 사기행각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며,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방향의 대전환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루터는 “만일 수도 생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아마 나였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거기에는 어떤 확신이나 평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은 오직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드디어 참된 기쁨과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이미 바울이 겪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정통 유대인 출신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는 율법의 자세한 본문까지 철두철미하게 지킬 때 하나님의 사랑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서울 정도로 열심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그저 의무감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그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무력함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거듭난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 그동안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던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빌 3:8-9).

바울은 이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전에 생명처럼 여기던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아닌, ‘장벽’이라는 것을 깨닫고, 율법을 허물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여기서 ‘헐었던 것’ 이라는 말은 바울이 어떤 율법 조항이나 ‘할례 제도’ 자체를 없앴다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울은 이방선교와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율법, 특히 할례로 인한 폐해를 허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할례를 시행하지 않고, 할례의 잘못된 부분을 정확히 인식하고,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토록 할례를 반대하며 허물려고 했습니까? 율법과 할례로 인해 발생한 폐해는 한마디로 ‘차별’입니다. 율법과 할례를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별의 담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차별이란, 구체적으로 볼 때, 이방인에 대한 차별, 여자에 대한 차별, 장애인에 대한 차별입니다. 이방인과 여자와 장애인은 할례를 받을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인하여, 구원의 울타리에서 배제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할례라는 차별의 담을 헐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갈 2:19)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율법을 극복해야만 온전한 믿음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만약 구원에 이르는 길에 율법이 작은 부분이라도 영향을 미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믿음과 또 무엇으로 말미암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불완전한 조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완전한 것’, 더 나아가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그런데 우리가 율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해 죽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한 것은, ‘율법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곧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때,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전반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라는 말은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의 삶의 방향과 목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후반부).

이제 바울은 자신을 위해 자기를 위해 희생하시고 헌신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겠다고 고백하며 다짐합니다. 바울이 그 어떤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고, 고난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파에 담대하게 나선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거부하고, 신앙적 가치관이 아닌 세속적 가치관에 얽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과거의 잘못된 성품이 남아있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라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런 믿음의 능력을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오해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도덕 폐기론’까지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 윤리적 타락과 반사회적인 폐해로 이어지곤 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죄짓는 방편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앞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저차원적인 삶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고차원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이 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생명주시기 위해 그 험한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늘 감사하며, 그 분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찬송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한 존 뉴튼의 이야기를 아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선장이었던 아버지를 통해 열한 살부터 선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시절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오는 노예선에서 일하게 되면서 온갖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잔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748년 어느 날 배 안에서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우연히 읽으면서 마음 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였으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고 목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가 회개한 지 29년 되는 1779년,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거듭난 자신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믿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러한 믿음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헌신된 삶을 살아도, 그것은 부족하기만 할 뿐입니다. 귀하신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의 헌신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며 새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있는 힘을 다해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삶을 통해 믿음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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