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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5.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새로운 사명

관리자 2015-04-05 (일) 11:00 9년전 1224  

새로운 사명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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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1884∼1972)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슬람 교도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에서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소.” 스탠리 존스는 “그것이 무엇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이슬람 교도는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가 역사적인 인물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의 빈 무덤 밖에는 볼 수 없지 않소?”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스탠리 존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맙소”라고 대답한 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의 말은 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 밖에는 없습니다.”

 

흔히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는 당시 권력자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상 부활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끔 해외 토픽에서 죽었다가 몇 시간 후나 며칠 후에 일어났다는 말은 들립니다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체포당할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요한 말고는 아무도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서 숨죽이고 숨어 있었습니다. 혹시나 예수님을 잡아간 유대인들의 눈에 띄어 해코지를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얼마후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긴 들었으나, 아직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 오히려 더 불안한 형편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숨긴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져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책임을 자기들에게 뒤집어 씌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숨어지내다가 예루살렘을 빠져나갈 생각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동안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서 다니느라고 생업도 다 놓고 있었기에 미래가 불투명했습니다. 그들은 기운을 잃고 용기를 잃었습니다.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투명함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높은 청년실업과 폭발직전의 가계부채, 고용시장 불안 등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정치 지도자들의 불의와 자본의 횡포 앞에서, 서민들의 삶은 불안하기 짝이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합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불안과 실패와 좌절을 다 떨쳐버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절망이요, 두려움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절망과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담대하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승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못박혔던 두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 권세에 패배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것은 더 이상 패배의 증거가 아니라, 확실한 승리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환상이나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못박히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승리는 개인적인 문제가 해결된 정도가 아닙니다. 일시적인 문제가 해결된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는 인간의 영원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절망과 좌절을 떨쳐 버리고 영원한 평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부활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민중들도 항상 의식주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수탈과 헤롯의 폭정, 종교의 횡포, 그 어디에도 백성들이 기댈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겼을 때,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경제 문제는 문제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장기 경제침체에 빠져 있습니다. 미국은 경제가 좀 회복되고 있다고 하지만, 전 세계의 경제사정은 악화되기만 하고 도무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점점 더, 사람들에게는 경제 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경제문제만 해결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경제만능주의요 자본주의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죄의 문제, 생명의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며, 그것만 해결되면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말로 그가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신 사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렸던 제자들에게 그 잘못을 꾸짖거나 책임을 물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21장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오는데, 주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역시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일망정, 새로운 사명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동안 소위 성도라고 하면서도 주님을 온전히 섬기지도 못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지도 못하고, 이웃에게 은혜를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도무지 내세울만한 헌신이 하나도 없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주님을 모른다고만 할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주님의 양을 먹이기 위해 맡겨주신 사명의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사명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웃을 사랑하며 돕는 것입니다. 바울이 소아시아와 유럽의 전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도 이와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하면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했지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 완수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기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2-2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숨을 내쉬며” 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고 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있던 제자들은 마치 흙덩이처럼 생명력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자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디서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않은 이는 여기 말씀대로 표현하면 흙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그렇게 연약하여 절망했던 제자들이 사명감에 불타 세계로 나갔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세계 복음화의 불길이 타오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도 주님이 평안과 함께 사명을 맡겨 주실 때,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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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였던 테일러씨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큰 아들은 가문의 이름을 날리기 위하여 의회에 나가 의원이 되었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James H. Taylor, 1832~1905)입니다. 그들 형제 중 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삶을 바쳤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 선교 사역을 위해 삶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어디에다 우리의 삶을 바치겠습니까?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주님이 주신 사명대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하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죄와 죽음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이들에게,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해줄 수 있는 길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 새벽을 깨우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일가친척, 이웃과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 부활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확장되는 데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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