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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6.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그리스도가 없는 삶

관리자 2015-08-16 (일) 11:00 8년전 3014  

그리스도가 없는 삶

엡 2:1-10

 

어떤 부잣집에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종은 어리석어서 주인이 항상 그를 무시하고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그 종을 불러 지팡이를 하나 건네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만나면 이 지팡이를 전해 주어라." 지팡이를 받아든 그 종은 자기보다 어리석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항상 그 지팡이를 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주인이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종이 주인의 방에 들어가서 병문안을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힘없이 누워 종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얼마 못살겠지. 내가 가는 길은 아주 먼 길이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야"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종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께서 그렇게 먼 길을 떠나시는데, 특별히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주인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이 주인 앞에 지팡이를 내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룻밤을 여행하더라도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먼 거리를 떠나시는데 아무 준비도 못하셨다니,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지팡이는 주인님이 가져가셔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죽음에 대비해 미리 준비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마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처럼 죽음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준비없이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죽음이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고행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행을 쌓아도 죽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고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기 위해, 백방에 사신을 보내 불로초를 찾아나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히 살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만큼 죽음은 인간의 삶과 밀착되어 있고, 필연적으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숙명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사는 동안 즐기기나 하자고 하면서 쾌락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입장은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숙명론자는 인생을 포기하게 되고, 쾌락주의자는 도덕적으로 방탕한 길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여기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인간의 노력과 행위는 배제됩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때,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이 구원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하는 고귀한 지위를 얻은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지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전적인 선물이며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사랑에 거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고귀한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의 이 고백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정녕 귀중한 것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정 고귀한 가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유리할 때는 귀하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불리하거나 고난이 닥치면 내팽개치는 가치라면, 그것은 진정으로 귀한 가치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외부적 요인이 바뀌더라도 결코 변치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고귀한 가치인 것입니다. 세상에 생명의 위협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을만한 그 무엇이 있습니까?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쾌락이 진정으로 고귀한 가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고귀하고도 확실하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능욕 받는 것조차 기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세상에 그 어떤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영광과 지위를 대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누리는 이 놀라운 지위는 그냥 누리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백성으로서 온갖 시련을 이기고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는 말씀처럼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선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조금만 유혹이 와도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바울조차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죄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세속적인 생활을 끊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때문에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신자 숫자가 작아서 문제입니까? 신자들이 지식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사회의 지도층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사회의 지도층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지난 2013년, ‘한국기독교목회자 협의회’(한목협)에서 글로벌 리서치(주)에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불신자들이 한국교회를 불신하는 이유는 “이단이 많아서”라는 답변이 10.7%, “이기주의 집단 같아서”라는 답변이 10.5%, “언행일치가 안되서”라는 답변이 9.4%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말합니다. 진리란 최고의 가치를 말합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삶도, 실천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식도 있고, 지위도 있고, 재물도 있고, 다 있으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캠페인이나 윤리운동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정체성부터 점검해 보아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바울도 “사망의 골짜기”에서 절규할 정도로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완전함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지, 그것이 진리를 진리로 여기지 않는 핑계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불완전함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진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의 곁을 떠나 타락의 길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영원한 저주 속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곧 우리에게는 ‘복음증거’와 ‘이웃사랑’의 과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면, 부자는 세상에서 살며 명품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즐기던,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거지는 그 부잣집의 음식 쓰레기를 뒤져 배를 채우던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똑같은 날 죽어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 나사로보다 음부에 들어간 부자를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가 음부에 떨어진 이유가 우리의 삶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죄입니까? 마틴 뉘밀러 목사(1892-1984)가 나치 정권 당시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 침묵했던 독일 지식인에 대해 통탄하며 지었다는 “그들이 내게 왔을 때”라는 시를 보면 ‘무관심’이야말로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자유의지를 혹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그리스도인 다운 실천이 결여된 삶, 그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그 놀라운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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