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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9.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지금 구원하소서

관리자 2015-03-29 (일) 11:00 9년전 1274  

지금 구원하소서

마태 21:1-11, 갈라디아서 3:23-29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정규교육과 비정규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정규교육은 고용된 교사(tutor)나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라는 교육을 전담하는 노예에 의해 개인적인 교습의 형태로 이루어지거나, 공공 학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서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라고 불리는 가신(家臣)은 가르치는 교사는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민의 가정에서는, 6세에서 16세의 어린이들의 생활을 보호하고, 감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노예에게 이일을 맡겼습니다. 그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학교에 데려 가고 오는 일과 후견인으로서의 시중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율법과 그리스도의 구원과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몽학선생”이라고 번역하고, 개정에서는 “초등교사”라 하였는데, 어찌되었든 이들의 임무는 아이가 성년이 되면 끝나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은 미숙한 인간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다가, 그리스도를 믿어 성년이 된 자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25)

실제적으로 율법의 역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즉,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실패와 무능에 대한 인식이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율법은 더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이후에는 더 이상 뗏목이 필요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강을 건넌 이후에도 뗏목이 너무 소중해서 머리에 이고 다닌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낌없이 뗏목을 버려야 앞으로 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거나, 뗏목의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성인이 된 사람이 과감하게 초등교사에게서 떠나고, 강을 건넌 사람이 뗏목을 버리듯, 율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은혜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죄와 사망으로 버림받은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같은 이방인들은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유대인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울같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던 사람도, 결국 그가 한 것이라고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기독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는 일에 혈안이 되었던 것뿐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과거의 자기 모습을 가리켜 “핍박자요 폭행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독이 되어, 오히려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말하기를 “만일 수도 생활로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온갖 훈련과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수행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구원의 감격이나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바울이나 루터에 비하면, 우리들의 수련이나 헌신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일 것입니다. 만일 율법 준수나 수련으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런데, 우리에게 이와 같은 큰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는 고난과 희생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정리하시고,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새끼”를 예수님께 끌고 왔다고 나오는데, 예수님은 아직 멍에도 메지 않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는 장차 멍에를 메게 될 어린 나귀처럼, 예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의 멍에를 메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스가랴 9:9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통치자들은 본래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말을 타고 입성을 합니다. 이에 비해 초라한 나귀를 탄다는 것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5).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인데도,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류의 살길이 열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조금만 능력이 있어도 자기를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들을 짓누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권세로 세상을 정복한 알렉산더나 시저, 그리고 나폴레옹 같은 사람에 의해서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과 정복 그리고 억압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온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였음을 볼 때, 겸손은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절제된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이 없는 곳에는 분쟁과 분열과 파멸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망정 대단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그러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배려하고, 겸손하고, 온유하면서, 부드러운, 온화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말을 타고 들어오는 호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신구약 중간기를 다룬 외경의 마카베오서를 보면 시리아의 탄압에 맞서 싸운 맛다디아 제사장 가문이 나오는데, 맛다디아가 죽은 다음에도 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이민족과의 전투를 거듭하여 결국 이민족을 무찌르고 성전을 정화하여 봉헌하게 됩니다. 이때 맛다디아의 아들 중에 시몬 마카베오가 가장 유명한 승리를 거둔 후,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을 때 대단한 군중들이 모여 환영했습니다.

“백칠십일년 이월 이십삼일에 유다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 소리도 드높게 비파와 꽹과리와 거문고 소리에 맞춰 찬미와 노래를 부르면서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민족의 큰 적이 참패를 당하고 이스라엘 땅 밖으로 쫓겨간 것을 축하하는 것이었다.”(마카베오상 13:51, 공동번역)

 

아마도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카베오의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도 초라하고 겸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에서 메시야성을 인식하고 예수님을 환영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이러한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는 시편 118편 25-2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 118:25-26)

 

그들은 “호산나”라고 외쳤는데, 이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이 말은 고난에 처한 백성들이 자기들의 왕이나 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유대인 독자들을 의식하여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추가 하였는데, 이는 구약에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 본래 시편 118:26은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서 하는 인사말이었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보일 무렵부터 기쁜 마음으로 부른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의미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이렇게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했습니다. 왕하 9:13절에 보면, 아합 가문과 이세벨을 처단한 예후를 왕으로 선포할 때, 사람들이 겉옷을 폈던 사례가 있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왕하 9:13)

또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편 선례도 있었는데, 아까도 언급했던 마카베오가 기원전 165년에 성전을 재봉헌하고 입성할 때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 소리도 드높게 비파와 꽹과리와 거문고 소리에 맞춰 찬미와 노래를 부르면서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마카베오상 13:51, 공동번역).

이처럼 겉옷이나 나뭇가지를 길에 펴는 것은 새로운 왕이 들어오는 길을 마련하면서, 그를 맞이하는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사용하여 이 감격과 기쁨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나귀새끼를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겉옷을 벗어 길에 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뭇가지를 다듬어 새 왕이 오는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 “호산나”하면서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메시야를 맞이하며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사실 매 순간마다 ‘종려주일’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새 왕을 맞이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에 왕으로 오신 주님을 날마다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맞이해야 합니다. 나귀를 드린 사람처럼, 겉옷을 벗어 드린 사람처럼, 종려나무를 꺾어 드린 사람처럼, 아니 목소리를 다하여 호산나 찬송한 사람처럼, 우리도 우리의 있는 것을 다 드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때 어떤 도시에서 일정한 숫자를 모병하는데 장정들을 모은 후 제비를 뽑아서 징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홀로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젊은이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젊은이가 뽑힌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대신 나갈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의 친구 중에서 부모님도 없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고아 청년이 친구 대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그 청년 덕분에 군대를 안 가게 된 젊은이는 전쟁 뉴스에 항상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군에 간 친구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치열한 전투 중에 그 친구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그 부대에서 친구의 시체를 인도받아 자기 가족 묘지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묘비에 “그는 나를 위해 죽으시다”라고 새겨놓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그 친구에게 평생동안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날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건지시기 위해서 죽음을 향해 행진을 하신 날입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께 오늘 호산나 하면서 “지금 구원하소서”하고 찬양 영광 돌려야 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할지 생각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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