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짐을 나누어 지라
갈 6:1-5
제가 오래전에 군종장교 훈련을 받을 때였습니다. 군종장교 후보생들은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광주 보병학교에서 강한 장교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훈련 중에 하나는 전남 장성에서 혹한기 훈련을 했을 때였습니다. 낮에는 유격 훈련을 받고, 밤에는 야영을 하기 위해 개인 천막에서 잠을 청해야 되는데, 매서운 칼바람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추위를 잊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혹한기 훈련의 마지막 관문은 완전무장을 하고 장성에서 보병학교가 있는 상무대까지 행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군장한 무게가 무려 30kg이 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짐을 메고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여간 힘든 훈련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행군이 시작되고 10km 정도 지나자 낙오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훈련을 받았던 동료 가운데 몸이 약했던 한 사람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도저히 계속 행군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행군을 포기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 전우 몇 사람이 나서서 그를 부축하고, 짐을 나누어 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총을 대신 들고, 어떤 사람은 그의 배낭을, 어떤 사람은 다른 장비를 짊어 졌습니다. 또 두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그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저도 그의 장비를 하나 더 들쳐 메었습니다. 그 장비는 대단히 무거웠습니다. 내 짐도 무거운데 거기에 또 하나의 짐을 보태니 다리가 휘청거릴 지경이었지만, 생사를 같이하는 전우를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젖먹던 힘까지 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더 행군했는데 그것은 마치 지옥을 향한 행진 같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들 자기 짐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기 때문에, 쓰러진 동료의 짐을 나누어 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어디서 다들 그런 힘이 나는지, 아무말 없이 그 동료의 짐을 나누어 지고는 수 십 킬로의 행군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극한상황에서도 전우애를 발휘하여,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끝까지 완주했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것이 '남의 짐을 져 주었을 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신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족과 형제자매, 친지, 이웃들이 함께 그 짐을 나누어 져줌으로써, 우리는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짐을 나누어 져 주는 것 정도가 아니라,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대신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우리 주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가실 때, 그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우셨겠습니까? 제가 훈련 받을 때, 몇 시간 동안 짐을 지고 가는 것도 고통이 대단했는데, 우리 주님이 모든 인류의 죄와 사망의 짐을 다 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을 때의 고통이란,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무서운 죄와 사망의 짐을 해결하기 위해서,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주님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잊어버리고, 그럭저럭 형식적인 신앙에 머무르지나 않고 있는지 돌아보면,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내 무거운 짐을 다 지시고 고통 받으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요청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짐을 내려놓고 한없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 짐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의 짐을 지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그런데 주님의 짐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것을 가리켜 “짐을 서로 지는 것”(2절)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 가운데는, 거짓 스승들의 꼬임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복음에서 떠나 기독교 신앙을 왜곡한 이들의 잘못을 꾸짖고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올바른 신앙에서 이탈하여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정죄하고 비난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믿음의 형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들을 책망하면서도 그들을 정죄하는 것보다, 바로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이는, 이웃을 비방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자신의 더러운 죄를 발견할 것이고, 이런 더러운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 받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죄인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게 된 사람은 남을 함부로 비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을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형제들의 허물을 감싸주지 못하고 도리어 정죄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끼리 서로 비난하면서 분쟁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교회 안에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사모하기 보다는 육체의 일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서로 파당을 나누어 분쟁을 일삼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이것을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고전 3:4).
바울은 이런 일이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우선 네 자신을 돌아보라”(1절)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것을 당장 멈추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3절).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어리석게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마치 의로운 존재인양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함부로 남을 정죄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남을 비방할 수 있는 정도로 의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남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도리어 나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1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아 온 여인을 예수 앞에 내던지고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냐고 시험을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순간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려고 손에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인간이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의 일탈행동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자기 자신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기도서인 "고백의 기도" 가운데는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반성하고 통회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바울의 이러한 '자기 성찰'을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진실을 감추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는 일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여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턱대고 남을 비방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내탓이오 타령'만 하고 있거나,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말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네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고통에 몰아넣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면서도,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이들을 향한 책망의 말입니다.
예를들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정부와 기업의 안일한 태도와 진실을 은폐하려는 모습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을 때, 몇 몇 교회에서 "잠잠히 있으라"거나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하면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가족이나 국민들에게 할 말이 아니라, 비리로 인해 초래된 사고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 지지 않으려고 했던, 아니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국정책임자와 군, 관, 경, 그리고 기업들에게 해야 하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 고 했습니다. “자기의 일을 살피라”는 말을 직역하면 '자신의 행실을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살피라'는 말은 금의 순도를 측정하듯 엄격하게 자신을 시험하고 돌이켜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자랑은 우월감에서 비롯된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랑,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내적 자신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과 권력을 앞세워,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을 호도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내적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어느 정도 속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당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만이 이러한 내적 자신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후서에서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고 했습니다. 실상 우리는 "주 안"에서가 아니면, 세상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합니다(시 49:6). 하지만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시 49:10). 그래서 바울은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씻김을 받고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자랑거리입니다.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렘 9:2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세상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살피고, 이웃을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인생의 문제를 담당하여 해결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 성도들을 돌보고, 그들의 짐을 나누어 져주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