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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1.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우리의 자랑, 십자가

관리자 2015-06-21 (일) 11:00 8년전 3056  

우리의 자랑, 십자가

갈 6:11-16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는 영국의 절대왕정을 수립한 강력한 군주였습니다.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헨리 8세는 그의 형이 요절한 덕택에 왕 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형의 미망인인 당대의 최고의 미녀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를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자 캐서린에게 싫증이 나서 이혼을 하고, 시녀 중에 젊고 아름다운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 일로 헨리 8세와 로마 교황청의 갈등은 깊어졌습니다. 결국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1534년 수장령을 내려 영국 성공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내 교회를 관리하는 모든 권한이 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한 법령입니다. 한마디로 ‘영국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규정한 법률입니다. 헨리 8세는 누구든지 이 수장령에 대해 서약하기를 거부하는 자를 반역죄로 간주하여 처형했습니다. 헨리 8세의 위세에 눌린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수장령에 서약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헨리 8세 국왕이 집권하고 있을 때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법관을 지내기도 한, 영국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왕과 나라를 성실하게 섬겼고 선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이 토마스 모어에게도 수장령과 의회에서 제정한 계승법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는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그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토마스 모어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처형되었습니다.

판결을 받기 전에 그는 “세속인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라며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처형대에 올라간 그는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좋은 신하이기 전에 하나님의 착한 종으로서 죽는다.”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어떤 핍박과 유혹을 겪게 된다고 해도, 토마스 모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확고한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머리 되시는 분은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세운 갈라디아 교회가 나중에 일대 혼란에 빠진 것은, 거짓 스승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할례를 받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해 왔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할례를 강조하는 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할례를 강조한 것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12절).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라는 말은 ‘할례를 통해 육체의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자’를 말합니다. 즉, 유대교의 전통에 충실하도록 이방인 신자들을 선동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할례를 강요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받는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와 ‘할례 문제 때문에 받는 박해’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당한 박해를 말합니다. 그 박해를 면하는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포기하는 길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면제해 줌으로써 유대교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했습니다. 그 박해를 면하는 길은 유대인의 주장대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계속 강요하는 것 뿐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할례를 강요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교인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유대사회로부터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거절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유대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보통의 유대인들이 유대교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시각장애인을 만나서 그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데, 그대로 했더니 눈이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라워 하면서, 그를 바리새인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 사이에서는 그의 눈이 나았다는 사실보다, ‘안식일에 그런 의료행위를 한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그가 시각 장애인이었다가 시력을 회복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고, 그의 아버지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그 시각장애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았던 것은 확실한데,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 누가 그의 눈을 보게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할 것이라”(요 9:20-21).

그런데 사실 그 시각장애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아들의 말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바리새인들 앞에서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예수님과 연루되어 유대공동체 안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요 9:22).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주셨다고 곧이곧대로 말했다가, 혹시 유대교에서 출교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이 두려웠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유대인들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즉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은, 사실 율법에 대한 충실성보다는, 할례를 받지 않는데서 오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고통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필사적으로 배고픔, 육체적 통증, 정신적 불안 등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따돌림 당하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 때문에 사람이 비겁해지기도 하고, 일신의 안일을 구하기 위해 대의를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신앙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의 불이익과 따돌림을 감수하고서라도, 심지어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자기 극복의 능력’를 보여줍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는 매우 무겁고 고통스러운 멍에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형을 당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꺼리는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십자가를 통해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아셨기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자들은, 세상의 그 어떤 위협이나 박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인간을 영원히 살리는 십자가보다 더 큰 능력이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고통스러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왔고, 우리에게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 중에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성 폴리캅(69-155)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온 병졸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준 뒤 화형대 앞에 섰다고 합니다. 그때 호민관이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나는 86년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고 주님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왕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겠는가?" 하고 화형대 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최고의 죽음은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 때,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칠 것입니다. 바울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헬라 철학에 능통한 자들도 로마제국에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사형도구인 십자가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도 만을 가르쳤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재물, 지식, 명예, 외모 등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깁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가문에서 났고, 로마 시민권을 가졌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닦았고, 의회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혹시 여전히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가문이 여러분의 자랑거리라면, 그리고 그런 것들만 추구하고 있다면, 자기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가진 세상적인 것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매어 세상 것만 아끼고 있다면, 아직도 “가장 고귀한 것”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혹시 주님과 그의 십자가를 자랑하다가 모든 것을 포기할 때가 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것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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