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1.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뉘게로 가오리이까?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0.04.11.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뉘게로 가오리이까?

관리자 2010-04-11 (일) 11:00 14년전 1468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 6:66-71절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유괴되어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후에 어른이 되어 자기 부모를 찾아 나서 결국에는 찾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찾기 전까지 그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사람들의 눈이 자신을 감시하고 고발하며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영혼에 깊은 상처를 받아 도저히 치유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수처럼 보이고, 세상의 모든 것들에 심한 저항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평생 찾던 부모를 만난 후에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전 세계가 그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 같았고,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선의로만 대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역할은 큽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줄 육신의 부모들을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으로 인도해줄 영적인 부모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영적인 부모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신자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영적 부모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고, 이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생명을 매번 새롭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인 부모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만났다 하더라도 형식적인 교제에 그쳐 버린다면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어 매번 절망과 고통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신실한 믿음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기도로써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면 우리의 삶은 기쁨과 행복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지방에서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또 소문으로 들어 더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모시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15절), 이적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적으로부터 생긴 음식을 먹으려고 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실로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이들이 각기 다른 기대를 가지고 나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교훈은 모인 무리들의 기대에 맞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무리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명예를 얻기 위해 교훈을 주시고 이적을 베푼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교훈은 세상적인 욕심으로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육신적인 것이었고 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교훈은 무리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무리들이 실망하는 것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망하고 주님을 배척할 것을 주님은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태도는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세상적인’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적인 욕망을 예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세상적인 욕망일지라도 예수께로 나온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왔을지라도 그 근본에는 조금이라도 예수가 주시는 영적인 생명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조그마한 관심도 없었다면 아마 교회에 절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인 관심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해서 세상적인 욕심만 바라고 예수를 믿으면 금방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을 통해 보여지는 예수의 교훈은 그러한 세속적인 욕망을 회개하고 복음의 진리를 붙들라고 매번 강력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주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1. 주님의 주변에 있다가 떠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길게 말씀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의 교훈에 실망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자신들의 요구와 아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했을 때는 어찌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할까 의아해했습니다. 그것은 구약 레위기의 말씀을 어기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17:10).

그들은 성만찬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성경은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신자인 우리는 그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러한 절대적인 순종 없이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자가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는 것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모르고 오로지 문자 그대로 믿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또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아간다는 믿음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문맥을 놓치고 어느 한 구절에 집착하여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큰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눅9:3-4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우리 신자들의 기본 자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 겸손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위 말씀을 문맥의 의미도 모른 체 자신의 믿음을 확고하게 한다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전도나 선교 여행할 때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 나 옷이나를 막론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가려는 신자가 있다면 그의 믿음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단순한’ 것이지 결코 예수께서 바라시는 ‘현명한’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이 말씀을 그 누가 문자 그대로 받아드리겠습니까? 정말로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고 해서 위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실족하였다고 하여 눈을 빼버리고 손을 잘라낸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예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모든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는데서 이단이 나옵니다.

이단만 이런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교회도 이런 문자주의적인 오류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

예수의 이 말씀은 우리의 기도의 근간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체 기도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약한 인간의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호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신자가 많습니다. 즉 위의 성경 말씀은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종류를 불문하고 이루어진다고 받아들이는 신자가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기도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실상은 우리의 믿음을 오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말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라면 기도는 전설 속에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로또의 1등 당첨 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질까요? 수능 시험 잘 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학생이 있는데, 열심히 공부 할 생각은 안하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니까 공부보다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록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 생각하고 수능 당일에 시험지 답이 칠판에 써지는 환상을 보도록 기도한다면 이루어질까요?

성경은 이런 개인적인 욕심에 치우친 기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려면 위의 성경 구절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구절을 참조해야 우리는 위의 성경 구절을 더 정확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장 말씀을 참조하면 기도에도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합당한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돈으로 오염될 대로 오염된 세속적인 욕망에 따라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합당하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큰 위험에 빠집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해석하기에 '쉬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바로 목회자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목회자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알기에 그 권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 성경 말씀의 권위를 당연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의 편집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 성경 말씀을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그 구절에만 사로잡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맹목적인 외고집만을 낳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입니다.

그 당시 무리들은 예수의 교훈을 듣고는 “이 말씀은 어렵도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의 교훈이 계속될 때 무리들은 예수의 곁을 떠났습니다. 실로 이적을 통해 떡을 먹고 열광적으로 따라왔던 무리들은 예수의 말씀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 때에는 예수를 따르려 했지만 길이 험하고 곤란한 일이 닥칠 때에는 떠나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폭도들에게 잡혀 가야뱌 대제사장 집 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위기가 왔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갈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22:54)고 성경은 말했습니다. 그 때 이미 그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여종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눅22:57)고 했고, 조금 후에 또 다른 사람이 “너도 그 도당이라”하자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다”(눅22:58)고 했고, 또 한 시간쯤 후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기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눅22:59)고 하자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눅22:60)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여 천국 열쇠까지 받은 사람인데도 이렇게 허약하여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부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수없이 모른다고 하지나 않았습니까? 예수께는 분명히 십자가의 길이 있음을 알고 그 뒤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주님 곁을 떠나갈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2. 우리가 주님의 배신자가 되지 않도록 언제나 주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이미 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꿈 가운데 야망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야망은 자기 성공을 위한 꿈이고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망을 향한 꿈을 가진 이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는 있어도 그 성공이 결국에는 그 사람의 패망을 가져옵니다.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웃을 이용합니다.

가롯 유다도 본래 유대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유대 나라가 세계 최강국인 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지가 항상 관심사였습니다.

그는 유대 독립을 위해 예수의 힘을 이용하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됐다면 아마 그는 성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유대 독립에 어떤 역할을 못한다고 생각하자 가차 없이 예수를 배신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이냐 내 중심이냐 사이에서 언제나 하나님 중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미켈란젤로가 많은 시간을 드려 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모델을 찾아다니다가 뛰어난 아름다움과 순결한 용모를 가진 한 젊은이를 발견하고 그를 예수로 그렸습니다.

그림을 조금씩 채워져 감에 따라 제자들이 차례로 그려졌습니다. 드디어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던 가롯 유다의 모델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도시의 빈민굴과 불량배들이 사는 동네를 두루 다녔습니다. 드디어 그는 너무나 타락하고 사악한 얼굴을 가진, 가롯 유다의 모델로 손색이 없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가롯 유다의 모델이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다 그렸을 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전에 나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천만에 그럴 리가 없지요” 그 사람이 다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지난 번에 당신은 나를 그렸습니다. 당신은 나를 그리스도로 그렸지요”

세월이 그처럼 무섭게 그를 타락하게 했습니다. 세월도 잔인했습니다. 세월은 우리의 이상과 꿈과 정열과 충성심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에게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 때만이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영생의 말씀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에게 실망한 무리들이 예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께서는 너무 슬펐을 것입니다. 그 동안 제자를, 그것도 많지 않은 제자들을 훈련시켰는데 그 수고도 헛되게 그들이 예수를 떠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애제자인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의 떡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듣고 올바르게 깨달은 첫 열매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마16:16)과 예수의 말씀이 영생의 양식임을 믿는 믿음과 그가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막14:29).

이것은 베드로의 확고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의 철학이나 인생관이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인 고백이요 응답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지나가는 한 사람에게 “굉장한 사랑을 받아 보소 싶지 않습니까? 놀랄만한 사랑을 받아 보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그 신사가 “받아 보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전도자는 “제가 그런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나가던 그 사람은 얼마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외로움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여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을 사랑하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한 것 이상으로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최고의 사랑의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의 고백을 받고 다른 어디로 가겠습니까? 예수 밖에는 다른 데로 갈 데가 없습니다.

예수를 모시고 삽시다. 이 예수를 세상에 전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주변에 머물다가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물러 주님의 자랑스런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생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깊이 영접하여 범사에 승리하는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