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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5.강남교회 성탄절 설교 -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관리자 2015-11-25 (수) 11:00 8년전 1560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눅 2:1-7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6.25 남북 전쟁, 그리고 독재정치로 얼룩진 암울한 시기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국민들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군사정부는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민주인사들을 수없이 체포 구금하였고, 아무런 죄도 없는 청년 대학생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또는 긴급조치 등을 남발하여 국가가 합법적으로 국민들을 탄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정말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한번은 서울대 대학생들이 대학 강당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강경하게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국은 경찰들을 투입하여 모두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곧 경찰들이 강당에 투입될 형국이었는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가는 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지만, 아무도 그런 상황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한 교수가 유리 창문을 깨고 강당으로 뛰어 들어가 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깨어진 유리 조각에 허리가 찔려 피를 흘리면서까지 학생들에게 들어간 그 교수는 평소에 학생들 편에 서있는 민주의식이 강한 교수였습니다. 학생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학생들을 위해 뛰어든 이 교수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강당에서의 벼랑 끝 농성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하고, 농성을 풀고 강당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농성을 시작한 학생들 중에서 한 사람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고,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문제 속에, 우리의 고민 속에 뛰어들어 오셨습니다. 주님만이 그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기에 그 분의 오심은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중동 지방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효율적인 세금 부과를 위해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나라의 백성들은 번거롭고 힘들지만 고향에 호적 등록을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유다 지파에 속했던 요셉도 부인인 마리아를 데리고 그들이 살던 갈릴리 지역을 떠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업을 내려놓고, 고향까지 며칠에서 몇 달이 걸리는 여행을 한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는 힘없는 식민지 백성인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힘든 것도 참고, 억울한 것도 참고, 로마 황제의 명령에 그저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 약 170km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마리아 땅을 거치지 않으려고 여리고를 지나 우회하여 베들레헴으로 가곤 했는데 그 거리가 최소한 230km 정도 됩니다.

또 성경에 보면,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 3일 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약 100km 정도가 됩니다. 하루에 약 33km 정도 이동하는 셈인데, 이것은 군인의 이동속도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즉 일반인은 많이 가봐야 하루에 약 30km를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까지 최소 10일 이상이 걸린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때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는 이미 만삭이 되어 해산할 날이 가까웠을 때였습니다. 베들레헴까지 가는 길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호적하는 문제도 지금과는 달리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사무능력과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감안해보면 그 복잡함이란 게 상상이 안 갈 정도입니다. 그러니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을 구하지 못해 마굿간에 여장을 풀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리고 복잡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 고통스러운 일을 모든 식민지 백성이 겪어야 했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 위한 황제의 명령 한 마디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여관 방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방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어느 마굿간 하나를 구하여 거기서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날 출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더럽고 형편없는 곳에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요셉과 마리아를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하고 서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즘 성탄절 성화를 보면, 대부분 동화같이 푸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첫 번째 성탄절에 일어난 실제의 사건은 인간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말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중산층 가정에서 볼 수 있는 행복한 출산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죄악이 가져온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우신 말구유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첫째로, 말구유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 줍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 나무로 만든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은, 33년 후에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일생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삶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중에 가장 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관심과 고통을 직접 체험하셔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피터 1세 대왕(1672-1725)은 성군이었다고 합니다. 표트르 대제라고도 불리는 그는 어렸을 때 권력투쟁에 희생당하여 궁궐 밖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밑바닥 생활을 했습니다. 석공일과 목수일을 배우기도 하고, 조선소에서 막노동자로서 일을 체험하기도 하고, 대포를 주조하는 일을 배우기도 하는 등 밑바닥 인생들의 삶의 얼마나 고된지를 알았습니다. 또 외국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신분을 속이고 군대에 졸병으로 들어가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서유럽의 앞선 문물을 배우기 위해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부사관으로 위장 복무하면서 대포조작 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네델란드에 가서는 목수로 위장하여 선박기술을 익히기도 하고, 영국에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러시아를 근대화시키고 발전시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몸소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과 더불어 사시면서 그들의 고통과 눈물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어려운 사정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다 아시기에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과 절망 가운데 눈물짓는 이들은 우리 주님의 말구유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세상에는 없는 희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구유를 보면서 예수님의 종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빌립보서 2:7에서 “종의 형체를 가지사”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우리 주님은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일생을 종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면서 베다니에서 어떤 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당시 풍습은 어느 집이나 하인이 나와 손님들의 발을 씻겨주는 법인데 그 집은 하인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 제자들 가운데서라도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려야 하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얼마 전에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께 ‘주님 나라가 임하면 자기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하소연한 일이 있는데, 이 일로 제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느라, 제일 낮은 자리에서 발을 씻을 기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섬김을 받기 원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발을 씻을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종의 자리에 내려가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전 인류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런 주의 리더십이야말로 오늘날처럼 살벌한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리더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웠던 말구유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리더십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기예수가 누운 말구유는 예수의 겸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겸손하셨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그런데 예수님의 비교될 수 없는 겸손함은 바로 구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유가 무엇입니까? 가축의 여물통입니다. 마치 여물통 안에 가축이 먹을 여물처럼 누워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밥’으로 오신 헌신과 겸손, 그 자체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말구유를 보면서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이 시대의 말구유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세속적인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쓸리기 보다는, 말구유에 누우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희생과 섬김, 겸손을 배워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천 년 전에 가장 먼저 말구유로 찾아오신 주님은, 지금도 이 시대의 말구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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