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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9.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인간은 가능성이 있는가?

관리자 2010-05-09 (일) 11:00 14년전 1414  

인간은 가능성이 있는가?

 

시편 8:3-9절

경남 산청 시골에서 자란 한 소년을 집안 형편이 어렵고 머리도 별로 좋지 않는데도 아버지는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는 대구 중학교에 다니는데 공부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1학년 방학 때 성적표를 받았는데 그 반이 68명이었는데 68등을 했습니다. 도저히 아버지에게 꼴찌를 한 성적표를 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끼니를 잇지 못하는 소작농 형편임에도 아들을 대구로 유학을 보냈는데 꼴찌를 했으니 머리가 나빠서 별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이 경우에는 정말로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잉크로 성적표를 1등으로 고쳐서 아버지에게 보내 드렸습니다. 대구에서 유학하는 아들이 방학이 되어 돌아왔으니 반가와서 일가 친척들이 아버지에게 “아들 공부 잘 했더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밝게 웃으며 “앞으로 보아야지. 이번에는 1등을 한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자네는 자식 하나는 잘 두었어. 1등을 했으니 책거리를 해야지”라고 좋아라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했고 그 집은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했지만, 그 이튿날 강에 가서 멱을 감고 돌아와 보니 한 마리 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돼지는 그 집의 재산 목록 1호였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버지 ....”하고 부르짖었지만 실망할 것 같아 말도 못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죄송해서 죽어 버리려고 강물 속에 들어가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후 그 소년은 달라졌습니다. 항상 그 일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로부터 17년 후에 그는 대학 교수가 되었고 45세가 되었을 때 지난 일을 생각하고 아버지께 사죄를 드리려고 “아버지,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하고 말하려는데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네 아들이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위조한 사실을 알고도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이신 아버지의 그 크신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후에 경북대학교 총장이 된 박찬석 박사입니다.

속 깊은 아버지는 이렇게 자식의 죄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시고 자식을 격려하시는데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잘 인도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인간을 두 가지 관점에서 정의합니다. 하나는 “인간은 하늘이다”는 관점입니다. 인간을 높이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종교로는 불교와 천도교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은 물질이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은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고, 인간을 물질로 격하시켜 결과적으로 인간이 가진 영적인 가치를 너무 낮추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유물론으로서 공산주의 사상의 기초를 이룹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간을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봅니다. 기독교적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하늘도 아니고 더군다나 물질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5)라고 말씀하고 있고,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8: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못하지만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것인데 그 인간을 만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에서 ‘목적’을 삶의 가장 큰 핵심적인 가치로 이야기 합니다.

신자는 나의 의도, 나의 가치, 나의 필요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삶의 목적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지으셨고, 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성경적으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녀로서의 성도의 본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일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만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고, 높이고, 찬양하고, 송축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찾아 주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지으시고 부르신 창조의 목적대로 예배를 드림으로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주님을 만나고 응답받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세상일이 많아 벅차니까 주일도 빠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쳐서 책상에 엎드려 잠깐 낮잠을 자는데 꿈을 꿨습니다.

꿈에 사다리가 보이더니 그 사다리가 하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단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투덜댑니다. “하나님! 단 하나를 빼서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드나요?” 그처럼 단이 하나 빠져 있으니까 오르기가 위험하기도 했고 힘도 배나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는데 어느 곳에서는 세 단이나 빠져 정말 오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데 너무 힘들어 불평했습니다. “하나님! 3단이나 없는 이런 사다리를 주시면 어떻게 하늘로 갑니까?”

그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 단은 하나님이 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일을 범해서 스스로 뺀 것이오.”

주일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 우리 영혼이 쉼을 얻게 될 것이고, 그때 하늘가는 우리의 길은 더욱 뚜렷하게 되고 더욱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면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많은 유익을 얻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부르시면 세상 일을 뒤로 하고 나와야 합니다. 바쁜 일도 뒤로 미루고 나와야 하고, 부부싸움을 했다고 해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때로는 부득이한 일로 토요일 밤에 술을 마셔서 술 냄새가 나도 나와야 합니다.

예배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긍휼의 하나님께서 그 부족함을 긍휼이 여기시고 많은 사랑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만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영광,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삽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것은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과 같이 지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성을 따라 우리 인간에게도 이성이라는 것이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이성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같이 거대한 창조물도 만드셨지만 인간은 그렇게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재료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성이라는 것이 없는 동물들이 집을 짓는 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은 유전된 본능에 따라 그들의 집을 짓습니다. 그들에게는 창조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짓는 집은 10년 된 아파트와 최근 아파트가 다릅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냅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전자제품들을 보며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하는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핸드폰만 해도 놀라운데, 요사이 스마트폰이 나왔는데 조그마한 전화기 하나로 컴퓨터 기능을 다하니 사람의 이성은 엄청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것 중에 이성 말고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물질의 유혹을 만나 스승 예수를 은 삼십 냥을 받고 팔았는데 그가 그 돈으로 편안하게 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돈으로 사업이나 무엇을 한 것이 아니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스승을 배신했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그는 괴로워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그 돈을 대제사장에게 되돌려 주려고 하였으나 그마저도 거절당하자 그 돈을 그들에게 내던지고 목을 매고 자살했습니다.

스승을 판 가룟 유다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양심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개가 사람을 물어서 죽었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는 소리 들어보았습니까? 양심은 이렇게 인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신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입니다. 사람의 겉보기에는 육체만 있는 것 같습니다. 피부, 살, 뼈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를 주장하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그 속사람을 심리학에서는 에고라고 하고 성경은 영 혹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유물론은 오직 물질만을 인정하여 영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영혼이 있는 것 같지만 죽으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발전기가 돌아가면 전기가 나오다가 발전기가 멈추면 안 나는 것처럼 육신이 살았을 때는 영혼이 있지만 죽으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은 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물을 주전자에 담아서 가스불에 얹고 가열하면 물이 증발하여 다 없어집니다.

보통 온도에서는 물이 액체로 있지만 뜨거워지면 기체로 변해서 공중에 발산됩니다. 그 기체를 다 모으면 원래의 물이 됩니다. 형태는 액체에서 기체로 변해도 물이라는 존재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도 죽어서 화장을 하지만 그런 화장도 화학적 변화일 뿐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어찌 영혼이 없어지겠습니까? 영혼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하게 만들어진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누구나 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동양 사상에서는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이도 있고 태어났을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을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성경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다 맞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위대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그 이후로는 태어나는 사람은 악하게 태어납니다.

지금의 우리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망하고 죽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돌과 두 여인]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두 여인이 노수도사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노수도사는 두 여인에게 참회의 고백을 시켰습니다.

첫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큰 죄인임을 고백했지만 둘째 여인은 자기는 지금껏 도덕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참회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수도사는 첫째 여인에게는 큰 돌을 하나 구해오라고 하고 둘째 여인에게는 작은 돌들을 많이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뒤에 노수도사는 주워온 돌들을 다시 본래의 자리에 두고 오라고 했습니다.

첫째 여인은 돌이 하나였기 때문에 금방 두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여인은 한두 개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알아도 그 나머지는 기억나지 않아 헤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노수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고백도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얼마만큼 죄가 심각한 문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외칠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인데 예수께서 오셔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는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아무 죄도 없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으로 죄의 값을 다 치루게 하였습니다.

우리 죄의 문제는 힘으로도 수양으로도 선한 일을 행함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하면서 예수를 주로 영접하면 해결됩니다.

예수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예수를 영접함으로 다 해결 받는 우리 모두가 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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