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
갈 6:17-18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들은, 도덕적인 순수성을 추구하여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매우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마을에서는 도둑질에 대해 매우 가혹한 형벌을 가했는데, 불에 달군 쇠로 이마에 낙인을 찍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마을의 어떤 청년이 남의 양을 도둑질하여 그 동네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청년은 곧 붙잡히고 말았는데, 그 마을의 어른들은 그 청년의 이마에 ‘양도둑’(Sheep Thief)이라는 글자의 첫 글자인 “ST”가 새겨진 쇠를 불에 달구어 이마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 후로 그 청년은 자기가 한 일을 크게 후회하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그의 한결같은 헌신을 보고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마을의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분은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예요. 아니 성자예요. 그러니까 이마에 성자라는 글자 Saint 의 약자인 S.T.라는 글자가 이마에 새겨져 있지 않겠어요? 나도 그분처럼 살래요.”
그에게 있던 양 도둑이라는 흔적이, 후에는 성자의 흔적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세상에 속했던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변화된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받고 의인이라고 인정받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바울이야말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일 것입니다. 본래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석학이었으며,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당시로서는 유대인들 가운데 최상위층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였는데,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 공동체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랬던 그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에는, 정반대로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복음을 증거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가죽 채찍의 끝에 쇠뭉치를 달아 때리는 태장을 맞기도 했습니다(고후 11:24-25). 이 태장을 맞다가 죽는 이들도 많았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1차 전도 여행 때에는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돌에 맞아 정신을 잃고 성 밖에 내던져지기도 했습니다(행 14:29). 또한 밤빌리아 주의 버가에서는 풍토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갈 4:13). 이런 끊임없는 고생을 겪으며 바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문이나 학문이나, 사회적 지위로 보아서는 정말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도,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상처로 인해 낙심하기 보다는, 그것을 가리켜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면서, 그 흔적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있는 상처를 ‘예수의 흔적’(스티그마)이라고 한 것은, 그것을 그 당시 노예의 몸에 찍힌 낙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주인이 노예의 몸에 자기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것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이 흔적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그가 노예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상처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롬 1:1, 빌 1:1).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팔리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요, 종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요즘 시대에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거나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그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게 속해 있고, 의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주체적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서,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럼없이 ‘주의 종’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고백합니다. 즉, 우리는 주의 노예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노예라면, 그것을 나타내는 낙인이 찍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얻은 상처야말로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런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곧 노예라고 고백했는데, 이는 말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세상의 노예들은 마지못해 주인을 섬기지만, 그는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위한 일에 쓰임 받는 종이라는 사실을 기뻐하였습니다.
본래 노예는 자기의 뜻을 앞세울 수가 없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노예 중에 가장 고된 일을 하는 노예는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일 것입니다. 우리가 《벤허》 같은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면,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의 발에는 쇠사슬이 매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휘하는 자의 명령대로만 움직일 뿐, 개인적 삶도 없고, 자유도 없습니다.
이처럼 ‘노예’로 산다는 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의 노예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노예는 자유도 박탈당하고, 주인으로부터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세상적인 사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참된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며, 참된 지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부리고 착취합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경우도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은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명령대로만 해야 합니다. 만일 주님이 노예가 안되겠다고 하면, 결국 죄에 종노릇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에 종 노릇하던 우리가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21).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다음에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과거 일제시대에 평안도 정주에 세워진 오산학교는 민족지도자들을 많이 키워낸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존경받는 교사가 한 분 있었는데, 해마다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 주었다고 합니다. 원래 그는 오산학교가 있던 정주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서 머슴살이를 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아놓곤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이 머슴의 자세를 보고,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학자금을 대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 청년은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조만식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조만식 선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가 큰 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우리는 이처럼 주님의 명령이라면, 비록 작은 일이라 할 지라도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즉시 가서 장사를 하고, 주인이 감시하지도 않았는데, 최선을 다해서 갑절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매우 수동적이었습니다. 그 돈을 땅에 묻어 놓았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주인의 이익은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무사 안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했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고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종입니까? 예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작은 일에도 충성하며, 적극적으로 일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수동적으로 주인의 눈치만 살피는 자입니까? 장사하는 주인이 그 종에게 원하는 것은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두 종은 그러한 주인의 뜻을 깨닫고 최선을 다했기에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일에 적극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받는 종이 될 수 있으며,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앗시시의 성자인 성 프랜시스는 어느 날 산꼭대기에 앉아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지평선에 넘실거리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던 예수님처럼 측은함과 비탄의 칼이 그의 심장을 찌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눈앞의 환상이 사라지고, 제정신이 돌아온 프랜시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손에 못자국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일생동안 그 못 자국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산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삶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일 것입니다.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기를 소원하며, 주의 일을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