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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0.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내가 그라

관리자 2010-06-20 (일) 11:00 13년전 1376  

내가 그라

요한복음 9:1-12

 

앤더슨이라는 사람이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을 그의 책에 실었습니다. 미국 뉴욕의 어느 지하철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일 아침이기 때문에 차 안에 별로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신문을 보는 사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들 등 각자가 무료하게 열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어떤 역에 정차했을 때 30대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남자는 자리를 잡았고 아이들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고함을 지르는 아이, 발에 걸리는 물건을 차는 아이, 집중해서 읽고 있는 신문을 뺏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장난으로 지하철 안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승객들은 그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잠자코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다들 화가 나서 꾹 참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때 지하철 승객 중의 한 명이었던 앤더슨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습니다. “선생님, 실례합니다. 댁의 아이들이 너무 소란을 피워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해하고 있으니 조용하도록 타일러 주세요”

그 말을 듣자 그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처음 알았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들을 향하지 않고 앤더슨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아이들을 단속해야 하나 지금 우리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한 시간 전에 아이들 엄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지금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앤더슨은 큰 충격을 받고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는 눈도 생각도 느낌도 감정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짜증은 온데 간데없이 달라졌습니다. 그 남자의 고통이 자기 가슴에 진한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제가 미처 선생님의 상황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뭐 도와 드릴 것이 없을까요?”

환경과 여건이 달라진 것이 없는 데도 한 인간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게 되자 보는 시각과 느끼는 감정이 달라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자 안목이 달라지고 반응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만큼 이해가 중요한 것입니다.

중국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장인 도행지 선생님이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보던 중, 학교의 후미진 곳에서 어느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를 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것도 돌로 머리를 찍으려고 하고 있었으니 교장선생님은 순간 당황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꾹 참고 가해학생에게 교장실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도행지 교장선생님은 이후에 가해학생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따끔하게 야단쳤을 것 같은 예상을 하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머니에서 사탕을 세 개를 꺼내더니,

“자, 이것은 너에게 주는 첫 번째 상이다. 내가 너에게 교장실로 따라 오라고 했을 때 야단맞을 줄 알면서도 먼저 와서 기다렸다. 그것에 대한 칭찬의 선물이다. 받아라.”

사탕을 엉겁결에 받아든 아이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몇 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움츠러들었으니 말입니다. 그 다음에 교장선생님은 주머니에서 또 사탕을 하나 꺼냈습니다.

“이것은 너에게 주는 두 번째 상이다. 내가 너에게 그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했을 때 너는 즉시 행동을 멈췄다. 그것은 내 말을 존중하고 따랐다는 증거다. 자, 받아라.”

아이는 놀라다 못해서 눈이 커다랗게 변했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을 그 아이는 하는 듯 했습니다.

“자, 마지막 세 번째 상으로 줄 사탕이다. 내가 교실에 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네가 그 아이를 때린 것은 그 아이가 여학생을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비록 폭력을 사용한 것이 바람직하지는 못해도 정의감에 불타 행동했기 때문에 정의의 사나이로서 행동한 것에 대한 상이다.”

그러자 그 아이는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교장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바뀐다 하여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따뜻한 이해의 마음이다. 만일 앤더슨이 아이들의 심한 장난에만 매몰되어 아버지를 윽박질렀더라면, 또 교장선생님이 폭력 사건에 매몰되어 앞뒤 안 가리고 가해학생을 체벌하였다면 그 아버지와 그 아이는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터이고, 앤더슨과 선생님에 대한 이해 대신 반감만 커져 갔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 날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보시고 그 맹인의 아픔을 ‘이해’하시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만나 해결 받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1. 고정 관념을 바꿔야 합니다.

 

제자들이 맹인을 보았을 때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이니까”(2절)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질병이 자신의 죄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선량한 사람은 사심 없는 행동을 한 결과 복을 받고 잘 살게 되나, 선량한 사람의 행동동기에 깔려 있는 순수한 자세를 이해할 수 없는 욕심 많은 모방자는 행동의 외형만 본뜨다가 불행한 결과에 이르고 만다는 응보(應報)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이러한 응보 사상에 의하면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눈이 멀게 되는 것은 자신이나 자신의 부모가 저지른 나쁜 행동의 결과입니다.

선량한 혹부리영감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감동한 도깨비들이 준 선물을 보고 욕심이 난 이웃의 혹부리영감이 이를 따라하다가 보물은커녕 혹까지 덤으로 얻었다는 혹부리영감 이야기나, 우연히 빠뜨린 도끼를 건져 준 산신령에게 정직하게 대한 나무꾼은 금·은도끼를 받지만 욕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 나무꾼은 자신의 도끼마저 잃게 된다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 부모의 재산을 다 차지하고도 동생을 박대하던 형이 착한 동생이 얻은 보물마저 빼앗아 욕심을 채우려다 벌을 받는다는 등 다양한 형제 간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 이웃사람이 마시고 젊어졌다는 샘물 이야기를 듣고 그 샘물을 한없이 마시다가 결국 어린아기가 되어버렸다는 젊어지는 샘물 이야기 등이 그런 응보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 받는다는 생각은 우리 한민족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죄의 형벌이 삼사대까지 간다는 말씀(출20:5, 34:7)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응보 사상은 신약 시대 뿐 아니라 구약 시대에까지 이르는 아주 일반적인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과 고난은 다 죄의 결과라는 응보 사상은 이처럼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도덕 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응보 사상을 거절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3절)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능력 안에서 그러한 응보사상은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 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맹인이 된 것이 죄의 댓가로 된 것이 아니라, 즉 자신이나 그 조상들의 죄의 응보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맹인의 ‘죄’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라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만 급급했지 실제로 그 맹인이 겪고 있을 고통의 끔찍함은 외면했습니다.

우리는 중환자실에 가서 그 같은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중환자를 보고 이러한 비인간적인 고통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전지전능하시고,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하시는가, 이것이 저 환자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사단의 역사란 말인가 등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제자들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절박한 중환자를 두고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러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고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고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같은 고통으로 함께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예수께 합심으로 전력을 다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민’이 아니라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을 예수께서는 원하시기에 이러한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응보사상으로 인해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환란, 고통, 질병, 실패가 다 우리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에 걸리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는 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응보사상으로 세상을 치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하신 사랑으로 이 세상을 치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암과 같은 병이 나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겪고 있는 그 고통을 돌아보시고 함께 아파하시고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그 병에서 승리하여 당신이 영광이 이 땅위에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여자 분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그만 자살을 결심하고 극약을 구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다가오더니 “엄마 이게 뭐야”고 묻자 말문이 막혀 “밥 잘 먹고 키 크게 해 주는 약이야”라고 하자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이 “그래 내가 먹고 빨리 커서 아빠가 될게” 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빠가 되어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아이의 눈을 마주보며 “그렇구나, 나에게는 아들이 있구나” 라고 깨닫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람이 문제만 보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인생관입니다.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보통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만 보고 낙심합니다. 또 힘들어 합니다. 신앙이란 그 문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소서”의 주인공 시각 장애인 안요한 목사는 갑자기 두 눈을 잃어 버리고서 자신의 고통만 생각했는데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 어려운 일이 자신에게만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그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기는 사람이 있고 도저히 못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임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 해결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방법으로 맹인을 고쳤는데 본문에서는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좀 이상한 방법이었습니다.

그 당시 침은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로마 시대의 책에는 피부병에 단식하는 사람의 침을 바르면 낫는다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때로는 말씀으로(막16:46) 고치셨고, 때로는 손을 대시면서(마20:34)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어떻게 고치든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확고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침으로 이긴 흙을 눈에 발라 놓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절)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은 성전 안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연못의 이름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의미를 가졌는데 예수께서 소경을 그런 곳으로 보냄으로써 연못의 이름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영적 실로암 못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소경된 자는 다 나와서 이적의 생수로 씻겨 영안이 열리는 이적을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소경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순종하여 실로암 연못에 가서 실로암 연못의 물에 씻음으로 눈이 뜨이는 이적을 경험한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육간의 치유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치유가 일어난 것은 예수의 명령에 대한 맹인의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왕인 사울과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면에서 달랐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사울이 더 멋있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그 집안에서 빼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된 후에 하나님께서 아말렉 전투에서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15:3)고 했건만 ‘아말렉 왕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긴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삼상15:9)은 남겼습니다.

하나님께는 이런 사울의 불순종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울을 왕을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15:11)고 하셨습니다.

불순종으로 그의 정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왕인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언약궤를 잘 모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치유가 일어납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고, 다른 장교들은 이 군인, 저 군인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나님께는 순종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가 안식일 날 맹인을 고친 것이 예루살렘에 파다하게 소문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나면서 눈먼 자를 고친 예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를 흠잡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못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어 평생 동안 빌어 먹을 수 밖에 없는 거지를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고쳐 주신 예수께 칭찬을 해 주지 못할망정 고소하려고 야단이니 인간은 정말 무서운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거지를 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8절)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다”(9절) 또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9절)고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심문하여 예수를 고소한 후 그 고소에 대한 ‘증인’으로 삼으려고 할 수도 있어서 그 맹인은 겁을 먹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내가 그로다”(9절)하고 담대히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고소의 증인으로 출두하여 예수를 적대하는 고위 성직자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많은 위협과 협박을 받을 것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습니다.

맹인은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인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만 채우려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구원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고, 교회는 힘을 얻고 부흥됩니다.

프랑스와 영국 간에 전쟁이 있을 때 프랑스에서는 청년들을 제비 뽑아 징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뽑힌 사람 대신 누군가 지원해 주면 징집이 면제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뽑혔는데 징집관들 앞에 서서 자기는 2년 전에 영국 포로가 되어 사형당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데 무슨 소린가?”하면서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2년 전에 징집되었을 때 자기 친구가 “이 사람아, 자네는 이미 결혼은 했고, 자식도 있고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나는 독신이고 우리 집에는 다른 형제들도 있으니 대신 군대에 가겠네”라고 그 대신 자원해 그 친구가 군대에 갔는데, 그만 영국 포로가 되어 사형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프랑스 황제에게 보고 되었고 나폴레옹 황제는 그에게 징집을 면제를 시켜 주었습니다. 이미 친구가 대신 죽어 주었기 때문에 그가 군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으니 우리는 다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예수의 은혜를 세상에 증거하면서 사람들이 이 예수를 믿고 그의 뜻대로 살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보다 복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의 은혜로 영생을 얻고 진리로 사는 길이 있는데 이것을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을 써 예수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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