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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평화를 주시는 메시야

관리자 2010-10-17 (일) 11:00 13년전 1327  

평화를 주시는 메시야

 

요한복음 12:12~19

 

라이프 잡지사의 기자가 영국을 방문하는 중에 기차 대합실 식당에 앉아있는 두 부부를 보았습니다. 마치 소꿉장난이나 하는 어린아이들 같이 정답게 앉아서 남편은 비스킷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를 주문했습니다.

부부는 옷차림으로 보아 퍽 가난한 부부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마주 보면서 손을 잡고 조용히 주문한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문한 비스킷과 차가 나왔습니다. 남편은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면서 남편의 모습을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한없이 고요한 평화가 맴돌았습니다. 그 때 남편은 먹던 비스킷의 반을 아내의 테이블 앞으로 밀어 놓더니 자신의 입에서 틀니를 뽑아 옆에 놓여 있는 냅킨으로 깨끗이 닦아서 아내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아내는 그 틀니를 받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에 넣고는 천천히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고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맛있게 먹는 아내의 모습을 다정스레 바라보았습니다.

코 끝이 찡해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 기자는 서둘러서 부부의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고 합니다.

이들 두 부부는 각자의 틀니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것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가난을 서로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가진 사랑이 어떠한지 뒤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최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당시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을 가진 이들이 보기에는 힘없는 자의 장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는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에너지가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모습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1. 구약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3대 명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월절이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유월절 일주일 전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왔거나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월절에는 270만명 정도가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명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은 마치 예수를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나 장군을 환영하듯이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마치 100여년 전 마카비 독립운동 당시 유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시몬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 때의 상황과 흡사했습니다(마카비상 13:51).

시몬 마카비가 수리아 군을 팔레스타인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유대 민족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입성 때도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유대인들도 이 찬송을 부르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찬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을 주전 500여년전(BC480-470)에 스가랴가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개선장군이 군마를 타고 위엄 있게 들어왔는데, 메시야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오신다고 스가랴는 예언했습니다.

이는 사랑과 평화의 구세주로 메시야가 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은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이뤄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솝 우화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개구리 이야기가 많습니다. 개구리들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들처럼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호기심 많은 개구리가 독수리를 찾아가 사정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고 싶다. 너의 다리를 붙잡고 한번만 날게 해다오”

독수리는 개구리의 요청을 받아 들였습니다. 드디어 개구리는 독수리의 다리를 붙잡고 꿈에도 그리던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 풍경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늘의 개구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중 한 개구리가 하늘의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해냈니?”

그러자 개구리는 우쭐해져서 독수리를 붙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했지.” 그 순간 개구리는 여지없이 땅으로 추락했습니다.

또 개구리에 관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연못가에서 생후 처음 황소를 본 어린 개구리들이 그 크기에 놀라 엄마 개구리에게 달려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엄마. 엄마. 저희가 금방 엄청나게 큰 녀석을 보고 왔어요.”

그러자 엄마 개구리는 배에 한껏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체 얼마나 크길래. 이 엄마보다 커?” 어린 개구리들은 엄마의 부풀린 모습을 보고는 개굴거리며 박수를 치면서도 아까 봤던 황소가 더 크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더욱 바람을 들이키며 배를 부풀렸습니다. “흡. 이래도?” “아니. 아니. 아직도 엄마가 훨씬 작아요.” “좋아. 허업. 이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요. 아직도 엄마가 작아요.”

결국 너무 심하게 바람을 들이키다가 ‘뻥’하고 배가 터져 엄마 개구리는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16:18)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칭찬해도 겸손하게 자신을 지킨 사람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한때 ‘맛세오’라는 사람과 함께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맛세오는 프란체스코에게 “왜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칭찬하며 당신의 말을 들으려하며 만나고 싶어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프란체스코는 한동안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서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왜 그런지 알고 싶습니까? 그것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의인과 악인을 내려다보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께서 죄인들 가운데서 나보다도 더 천하고, 더 부족하고, 더 큰 죄인을 보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택하사 존귀하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모습이면서도 겸손하게 나귀를 타신 것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이름만 높여야 할 것입니다.

 

2. 나귀를 타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님을 증거했습니다.

 

개선장군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타는 말은 많은 위엄이 있지만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오신 것은 웃음거리 같았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나귀를 귀인들이 매우 요긴하게 사용하는 점잖은 동물로 보는 정도였습니다(삼하17:23).

예수 당시에 말은 전쟁 때에 장군이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정복자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시에는 왕이 나귀를 타는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당신 스스로 유대 민족이 열망하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인 무력으로 로마 제국을 정복할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메시야 됨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세계적인 나라를 세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곧 예수 믿어서 사업에 성공하고 권력도 잡고 세상에서 명예를 높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영생을 주시는 메시야였습니다. 전 인류를 위해서 온 몸을 내어 주기까지 희생하신 메시야이십니다.

주님은 폭력과 물질로 세상을 지배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 인류를 다스리시는 겸손한 메시야이십니다. 권력으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는 사랑으로 만인을 섬기는 메시야이십니다.

한 작은 소년이 난치병에 걸린 여동생을 위해 수혈을 해야 했습니다. 소년은 2년 전에 같은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었고, 동생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병마와 싸울 수 있도록 오빠의 항체를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동생과 같은 희귀한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년이야말로 이상적인 항체 제공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네 피를 동생에게 줄 수 있겠니?” 의사가 물었습니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습니다. 오빠의 아랫입술이 떨렸습니다. 잠시 후 그는 방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이죠. 제 동생을 위해서잖아요.”

침상에 나란히 누운 채, 오누이는 병실로 돌아갔습니다. 오빠는 튼튼하고 건강했지만, 여동생은 여위었고 창백했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동생과 눈이 마주치자, 오빠는 웃어 버렸습니다.

간호사가 팔에 주사를 꽂고 혈액이 튜브를 타고 동생의 몸으로 흘러들어 가자 오빠의 미소가 잦아들었습니다. 그 힘든 과정이 거의 끝나 갈 때까지 그 방은 내내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그때 오빠가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저는 언제 죽나요?” 소년이 동생을 살리기 위해 일생일대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사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하시려고 돌아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그러나 이런 사랑의 예수를 그곳에 모인 군중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를 매일 모시고 살았던 제자들마저 정치적인 메시야론에 현혹되어 있었으니 다른 백성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호산나’ 찬송을 외친 자들이 다 그 모양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이들이 빌라도 앞에서 바나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세상 욕망으로 예수를 따르던 자들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를 영생을 주시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그 분의 진정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고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칩니다.

 

3. 예수는 평화의 왕이심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과 존귀를 다 가지고 계시면서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평화의 왕이심을 증표하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마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대중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메시야의 꿈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로마로부터 구해준 정치적인 능력자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평강을 주시는 예수께서는 권력이나 돈이나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시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주시는 메시야이십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괴로움, 불안, 공포, 허무와 갈등으로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내적 평안을 주시고, 그러한 평안을 우리 이웃에게도 주십니다.

우리의 이웃 가운데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이웃이 바로 북한입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남북 사이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어 남북 간에 드디어 평화가 왔다고 생각했지만 새 정부가 들어와 남북관계가 상호주의로 되면서 각종 문제가 야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하면서 북한을 감싸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평화가 오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야 남북이 아름다운 관계가 될 것입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니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해 오히려 두 나라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칠레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갔습니다.

양국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있는 기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가 바라보고 있는 땅은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은 예수의 사랑의 보살핌이 무엇보다 필요한 나라입니다. 주님의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가 그들과 하나가 되어 이 나라의 미래를 열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과 땅의 주인 되신 예수의 은혜를 받아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우리 마음과 가정과 나라와 세계에 모시어 영원한 평화를 누리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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