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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불신의 세대

관리자 2010-02-07 (일) 11:00 14년전 1410  

불신의 세대

요한복음 5:41-47절

미국의 유나이티드 항공에서 여승무원들에게 “날씬해야 한다. 섹시해야 한다.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 항공사는 1989년에서 1994년까지 5년 동안 여승무원들에게 날씬하고 섹시하고 매력적인 몸매를 유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항공사는 여승무원들 가운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감봉, 정직, 해고까지 했습니다. 여승무원들은 참다못해 변호사를 세워 유나이티드 항공이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고 차별을 했다고 고소했습니다.

고소를 접수한 법원은 여성에게 날씬한 몸매를 강요한 것은 위법이라며 여승무원 16000명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뉴스는 전 세계 비만 여성들에게 희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미국의 어떤 비만자는 “비만자들이여 안심하라, 힘내라, 걱정말라”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만을 옹호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현자들이 중도의 길, 즉 중용의 덕을 찬양했습니다.

육신의 비만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비만이라고 할 교만도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의 처지와 신분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멋대로 행동할 때 발생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모스 섬의 어느 농가에 나귀와 수탉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숲 속에서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사자가 마을 근방까지 내려와서 어슬렁거리다가 이 집 담을 넘겨다보게 되었습니다.

나귀는 사자를 보는 순간 기가 질려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못하고 이승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탉은 어찌나 놀랐던지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가 크게 날개를 치며 죽을힘을 다해 울어댔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사자대로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귀를 찢는 듯한 소리에 기겁을 하여 숲 속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이를 본 나귀는 사자도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자를 겁 많은 동물로 오해한 나귀는 사자를 쫓아 숲 속으로 따라 들어가면서 수탉 울음소리를 흉내 냈습니다. 사자는 생전 처음 들은 무서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데까지 도망치다가 그래도 뒤따라오며 히히힝 거리는 나귀를 손쉽게 잡아먹었습니다.

평생 동안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도 했는데 아무 것도 변한 것도 없고 믿음도 전혀 없는 사람이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남에 대한 비판에는 앞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영적인 교만에 빠진 사람입니다. 영적인 교만에 빠진 사람은 잠언에 나와 있는 경고를 잘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예수가 말씀을 전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말씀과 교훈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현대의 불신의 세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데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심히 교만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를 받아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고 주님이 주시는 겸손한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1.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역사철학자 토인비는 세계를 리드한 민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은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인터넷에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터넷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기사 밑에 수없이 달려 있는 댓글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적일까 하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말과 행동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하나님과 교회에 욕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판이 나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의 기사와 이적을 직접 보았고 교훈도 직접 들었으면서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뵙고도 어찌하여 믿지 않았을까 그들은 복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던 사람들이었는데 막상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니까 배척했습니다.

인간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 말과 증거를 신뢰하는 법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유대교와 회교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증언한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를 대표했던 양심적인 신앙인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있는데, 그도 예수를 믿었기에 일제의 폭압에 대항해 민족주의 운동을 소신있게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정치에 뜻을 두고 개화파 지도자 박정양의 문하에 들어간 이상재는 출세의 길을 달려, 1894년 무렵에는 승정원 우부승지, 경연관 참찬관 벼슬을 얻어 고종에게 직언할 수 있는 정3품 당상관 자리에 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박정양을 수행하여 1881년 일본, 1887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서구문명에 대해 어느 정도 열린 자세였으나 유교 정신만은 지켜야 한다는 수구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886년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온 서재필과 윤치호가 독립협회라는 정치적 시민단체를 결성하였을 때, 부회장으로 참여는 하면서도 집회 때마다 기도와 찬송을 불러 독립협회를 기독교적 시민운동으로 전개하려는 서재필이나 윤치호의 시도를 봉쇄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1902년 보수파가 꾸민 정치적 음모사건에 휘말려 아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은 독립협회 해산(1899년)이후 자신과 같은 처지로 갇힌 정치범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승만, 신흥우, 김정식, 유성준, 홍재기, 안국선, 김린 등 하나같이 양반 소리를 듣던 개화파 인사들이었습니다.

이상재는 자신을 무고한 보수파 인사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세상이 변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투옥 기간이 2년을 넘자 절망과 불안이 그를 감쌌습니다.

그 무렵, 감옥에는 도서실이 마련되어 선교사들이 넣어 준 기독교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책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상재였지만 차차 세월이 지나면서 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1887년 미국에 갔을 때 통역으로 왔던 중국 공사관 직원에게서 선물로 받은 성경을 읽다가 “요망한 책”이라며 던져 버렸던 그가 감옥 안에서 다시 성경을 펼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비몽사몽 간에 ‘위대한 임금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호통을 쳤습니다. “내가 네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주었거늘 그때마다 거절하였다. 그래도 네 생명을 보전하여 이곳에 두었고 이번이 마지막으로 너와 네 민족이 진보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노라.”

꿈을 꾸고 난 후 이상재는 두려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유교의 가르침만 진리라고 생각하여 성경을 무시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지어온 죄를 ‘통회자복’하였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에 가득찬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오는 감격의 체험이 뒤따랐습니다. 유학자, 벼슬한 자의 교만과 증오 대신 그리스도의 겸비와 사랑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고, 그 영원한 소망에 맞게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죽음이 없습니다. 마땅히신자는 이런 예수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의식해야지 사람을 의식합니다. 우리가 헌금한 것이나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알면 됩니다. 사람이 알아주기를 원하면 안 됩니다.

우리교회의 헌금은 예배당 입구에 비치한 헌금함에 넣도록 했습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봉사하는 것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쉐마교육을 꼭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는 교훈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더욱이 유대인(Jew)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배웠는데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시장이나 광장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는 얄팍한 수단을 썼습니다. 또 금식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기 위함이건만 그들은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게 하여 신앙적인 성자인 것처럼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 것이 최고의 관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외식’이라는 허위와 위선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는 밤 12시에 시작하는 자정기도가 있었습니다. 매주 금요일 밤 12시에 드리는 자정기도를 철야기도라 하였습니다. 그 철야기도의 전통이 요즘에는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해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다가 아예 저녁 7시 예배로 드리는 교회까지 생겼습니다.

그것이 불만이었던 어느 교회에서는 옛날 전통대로 되돌아가자고 하여 밤 12시부터 철야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인지라 밤 12시 이후부터 새벽까지 기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기도하면서 졸았습니다. 코를 골면서 잠에 떨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건한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눈을 뜨고 보니 모두 자고 있는지라 “쯧쯧 사람들하고는... 아무도 기도할 마음이 없군! 차라리 이불을 덮고 누우시지. 저게 뭐야, 아이고 저 장로님은 아예 시체처럼 누워 있군!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네... 오 주님... 얼마나 보기에 민망하십니까?”

그때 하늘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렇게 깨어서 하는 일이 남 흉보는 일이라면, 차라리 너도 얼른 자거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며 그것은 정치적 제스쳐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제스쳐는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우리에게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3. 사람들은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예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초점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여자의 후손이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예수에 대한 예언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는 신명기서 18:1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뚜렷한 묘사는 이사야서 53:4-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잘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신구약 성경 그 어디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지 않은 곳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1세기에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가 헤롯왕에게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고 하니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헤롯왕에게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알려 주었으나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지는 않았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미5:2).

유대인들은 성경을 공부하여 그 내용은 많이 알았으나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지식은 많았으나 그 지식에 대한 믿음이나 행함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많이 읽어 성경 지식은 많음에도 예수를 못 만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만 알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설교가 오리겐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생을 복음전도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의 생활은 당시 극도로 피폐하였으나 그는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선생님 그 고귀한 생활의 비밀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 프란시스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재산을 포기하고 빈민과 고아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그도 역시 그 비결을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고찬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안도 안주 출신의 갖바치로 전형적인 노름꾼에 사기꾼에 술꾼이었습니다. 관아에 수없이 잡혀가서 매를 숱하게 맞아서 나중에는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죽으려고 독약을 먹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사람이 반*신이 되어 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와있던 미국 출신의 게일 선교사가 전도를 했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그에게 야곱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에 와서 그 전도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날 밤 꿈에 흰 옷 입은 누가 나타나더니 “야 이놈아!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는 “고고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천민, 신발 만드는 갖바치는 이름이 없었고, 다만 성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고고고고”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음성이 또 물었습니다. “야 이놈아! 똑똑히 말해라. 네 이름이 뭐냐?” 그래서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내 이름은 고가이구요. 싸움꾼이요, 술꾼이요, 망나니올시다.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크신 어르신 같은데 나를 좀 용서하고 살려 주십시오!” 그러니까 흰 옷 입은 그 사람이 탁 몸을 때리면서 “야 이놈아!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이렇게 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후 하도 꿈이 이상해서 전날 받은 전도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지를 자꾸 읽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혀가 열려서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도 신기해서 그 전도지를 준 게일 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원래 이 고찬익이라는 사람은 짐승가죽으로 신을 만드는 갖바치로 조선사회에서 멸시받던 천민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라는 성만 있었지 이름이 없었는데 게일 선교사가 남에게 많은 이익을 끼치라는 의미에서 그에게 도울 찬(贊), 더할 익(益)자를 써서 찬익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찬익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새사람이 된 고찬익은 자신이 과거에 해를 입혔거나 신세를 졌던 사람을 찾아다니며 “나는 도둑놈에 싸움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신발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신발을 만들어 주며 일일이 복음을 전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그 난봉꾼에 망나니가 저렇게 변화될 수 있느냐고 감탄을 했습니다. 결국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예수께 돌아왔고 1904년에 연동교회 장로가 되어 평생을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악한 세대에 축복받는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정과 나라가 잘 되는 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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