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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죽은 자여 주님의 음성을 들어라

관리자 2010-01-31 (일) 11:00 14년전 1257  

죽은 자여 주님의 음성을 들어라

요한복음 5:25-29절 

 

사람이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동물 가운데 뱀처럼 징그럽고 무서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TV에서 보니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다 뱀을 두려워합니다.

그 중에서도 독사는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독사가 사람에게 미치는 해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합니다. 100명이 독사에게 물리면 죽는 사람은 겨우 2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벼락에 맞아 죽는 사람은 독사에게 물려 죽는 사람보다 100배에 해당한다고 하며 살인사건으로 죽는 사람은 400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뱀보다도 벼락이고, 벼락보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악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너무 무서운 존재입니다.

인간이 선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에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맹자는 인간이 우연하게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늘이 만들어낸 고귀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엔 당연히 하늘의 모습이 들어 있고 하늘의 모습을 가진 인간은 개나, 돼지와 같은 동물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며칠째 그의 부인은 밥을 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도둑이 이 선비의 집에 몰래 침입했습니다. 도둑은 여기저기 훔칠만한 물건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둑은 물건을 찾아다니다 결국 지쳐 부엌에 가서 밥이나 훔쳐 먹고 가자고 생각해고 부엌엘 들어갔는데 솥엔 밥을 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뒤져 봤지만 곡식 한 톨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방안에서는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는데 며칠을 굶었지만 전혀 지친 기색도 없어보였습니다. 홀연 도둑은 선비의 기상에 감화되었습니다. ‘굶고도 저렇게 열심히 책을 읽다니’ 도둑은 자기가 다른 집에서 훔쳐온 쌀을 선비의 부엌 쌀 항아리에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웬지 누군가를 도와주었다는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맘으로 그 집을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한 측면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순자는 성악설로 이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순자에 의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욕구를 지니고 태어나므로 이 욕구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염치와 예의를 모르고 오로지 욕구에만 충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이기적인 본성은 사회적 교육에 의하여 선하게 교화되어야 하며 어떤 규칙에 의하여 행위가 제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소설에 도적질하는 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양복파는 집에서 옷 한 벌을 입어보다가 바지를 입고는 그대로 내달려 도망쳤습니다.

“도둑이야!” 하고 주인이 뒤쫓자 길에 있던 순경도 같이 뒤쫓았습니다. “거기서라!” 순경이 뒤쫓으면서 소리칩니다. 그래도 도적이 계속해서 줄행랑을 치니까 이번에는 총을 겨누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소리쳤습니다.

위로 쏘면 죽을까봐 아래쪽으로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쫓아오던 주인은 “위로 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래쪽으로 쏘면 바지에 구멍이 날까봐 걱정해서였습니다.

양복점 주인은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기네 바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재물에 눈이 어두워 다른 사람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악한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악한지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상상할 수 없이 무섭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아들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문제로 아우 아벨을 죽이고도 하나님 앞에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악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는 살았으나 이미 죽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하나님의 이 말씀을 어기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육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혜로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받기를 바랍니다.

1.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주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첫 번째로 주님을 따라 살려고 노력(trying)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현재의 상태에 만족합니다.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결하게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것으로 압니다. 그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술, 담배를 끊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상 친구들도 끊지 못했습니다. 세상 친구들을 잘 리드해서 옳은 데로 인도 할 수 있으면 같이 어울리고 그렇지 못하면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지 못했기에 친구들과 화투를 해서 그만 그의 집과 사업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두 번째, 영적으로 죽은 상태는 느낌(feeling)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죄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합니다. 악을 보고 의분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을 보면 마음에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세 번째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는 생각(thinking)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뜨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알파를 해도 양육반, 제자반을 해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를 귀찮게 하는 장애물로 생각하여 참여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깊은 생각이 없습니다.

네 번째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는 회개(repenting)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죄를 지어도 전혀 마음이 괴롭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고 나쁜 짓을 해도 후회나 마음의 괴로움이 없으면 그의 영혼은 죽은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재판을 받은 가야바 법정에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고 너무 괴로워 밖으로 나와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민감한 반응을 했기 때문에 세계 교회의 기초자가 되고 반석이 되고 수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대로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사람 안에 거하던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났으며, 그것이 바로 육과 영의 분리였습니다. 그 후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죽음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땅을 다스리는 대신, 그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원을 남용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뒤틀려진 결과이며, 사람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비참한 상태에 빠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그들의 육체와 분리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인생을 영위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당할 날이 올 것이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경은 그 책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3).

심판을 받은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데, 분리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사람이 영적으로 타락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들에게 전도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을 불순종과 많은 죄악으로부터 건져내야 합니다. 그들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건져내어 다시 영적으로 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심판을 향하여 한 걸음씩 옮기고 있는 그들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네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절)고 하셨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하이드 파크에서 어떤 전도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전도하는데 어떤 사람이 거지 하나를 데리고 와서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우리 공산당은 이런 거지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데 당신들은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전도자는 “예, 공산당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만 우리 예수님은 거지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는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했던 무당으로 첩을 두고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가 전도를 받고 고민하다가 크게 결단을 하고 옛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그의 전 재산을 교회 건축에 내 놓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훌륭하게 잘 섬기는 이가 되었고, 아들 낙준은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도 잘되고 아들도 훌륭한 목사가 되었고 연세대 총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삽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긍정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은 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죽은 영혼이 삽니다.

미국의 대부호였던 록펠러는 그의 어머니가 일러 준 세 가지를 꼭 지켜 영향력 있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가서 앉는 것이고, 둘째는 수입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는 것이고, 셋째는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것입니다.

결국 록펠러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설교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빌리 선데이가 소년 시절에 교회에 나가서 그 교회 목사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 목사는 그에게 당부했습니다.

1) 매일 15분씩 성경을 읽고, 2) 매일 15분씩 하나님과 이야기(기도)를 나누고, 3) 매일 15분씩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전도), 4) 매일 15분씩 희생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 그리하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는 후에 그 말씀대로 살아 역사에 남는 목사요 부흥사가 되어 미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는 요즈음 같이 자녀들을 양육하기가 어려운 때가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녀들을 양육하면 그 자녀들이 자라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충성된 일꾼들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 말씀 외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3.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께 심판하는 권세를 주셔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6-27절).

주님의 권세 가운데 심판의 권세는 무섭습니다. 이 심판의 권세는 세상 마지막 날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서 어떻게 또 마지막 날에 심판을 하게 되십니까? 그분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까지 흘렸는데 어떻게 무서운 심판을 하십니까?

그러나 주님의 그 큰 은혜를 져 버리는 자에게 심판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피공로를 져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비웃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심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은 공정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심판은 불공정합니다. 우리나라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법관이 공정하지 않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우리 생각에 옳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공평한 사람의 판단도 옳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편견과 무지와 독선 때문에 인간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무결함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기준을 아십니다.

한 사원에 고명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매춘부의 집이 있었습니다. 사원은 성스러웠으나 매춘부의 집에는 건달들이 쉬임없이 들락거렸습니다.

어느 날 수도사는 매춘부를 불러다 놓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대는 밤낮으로 죄를 짓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죄의 대가를 받으려고 그러느냐.”

가난한 매춘부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무식하고 재주 없는 이 여인은 다른 직업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내들의 출입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도사는 매춘부의 집으로 사내들이 들어갈 때마다 뜰에 돌을 하나씩 주워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감에 따라 돌무더기가 커갔습니다. 하루는 수도사가 매춘부한테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질책했습니다.

“여인아, 이 돌무더기가 보이느냐? 이 돌 하나하나는 네가 상대한 건달들의 숫자이다. 천벌을 받을지고!” 매춘부는 두려움에 떨며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그의 찬방에 꿇어 엎드려 울면서 통회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서 이 비참한 생활에서 이 몸을 벗어나게 하소서.”

그날 밤 죽음의 천사가 이 골목에 찾아왔습니다. 수도사를 데려갔고 매춘부를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매춘부는 천당으로 인도되고 수도사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매춘부가 천당으로 가는 것을 본 수도사의 눈에 불이 일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이렇단 말인가. 나는 일생 동안 금욕과 절제 속에서 신을 경배하며 살았다. 그런 나는 지옥으로 가게 되고 일생 동안 간음죄만 지은 저 여인은 하늘나라로 가게 되다니 말이 되는가?”

하나님의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수도사여. 신의 심판은 공명정대한 것이다. 너는 평생 수도사라는 자만심과 명예만을 지키며 살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만 가릴 줄 알았지 사랑은 베풀 줄 몰랐다. 그러나 보라! 저 여인은 몸으로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마음으로는 진정한 기도를 했다. 가난한 이웃과 끼니를 나눠먹고 의로운 자의 편을 들기도 한 적도 있으니 얼마나 갸륵한가.”

신의 사자는 수도사에게 지상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도사의 장례차는 온통 꽃으로 꾸며져 있었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춘부의 시신은 헌 누더기로 싸여 있었습니다. 꽃 한송이 없었고 찾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말했습니다. “잘 알아두어라. 지상의 대접이 하늘의 대접과는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으로 하시기에 정확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심판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 심판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산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영적으로 죽은 자가 있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야 합니다.

듣고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생명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영광스러움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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