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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예수의 궁극적 승리

관리자 2010-01-24 (일) 11:00 14년전 1317  

예수의 궁극적 승리

 

요한복음 5:21-24절

 

1704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는 칠레 해안에서 약 400마일 떨어진 무인도에 혼자 떠밀려 왔습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소총 한 자루와 화약 약간, 칼 한 자루와 목공 도구뿐이었습니다. 섬 안을 둘러보니 염소, 고양이, 쥐 그리고 밤이 되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처음 보는 동물들 밖에 없었습니다.

며칠을 해변가에서 물고기로 연명을 하며 구조를 기다렸지만 그를 구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짝짓기 철이 되어 몰려드는 바다사자들 때문에 해안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다만 바라 보고 배만 기다릴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 그는 오지의 숲 속에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섬에서 자란 나무로 오두막을 지었고 과일나무도 길렀습니다. 염소를 사냥하는 법도 터득했고 야생 고양이를 길러 쥐들을 쫓아내고 그 절절하던 외로움도 많이 달래주었습니다. 쓸모 없어진 소총을 분해해 연장을 만들었고 구두장이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 동물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결국 몇 년 후 그는 무인도에서 구출되었고 [로빈슨 크루소]라는 작품 탄생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1659-1731)가 쓴 [로빈슨 크루소]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주인공 크루소의 긍정적인 사고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다에 표류하여 무인도에 단 홀로 살게 되어 외로웠으나 자연의 과일을 먹게 되었고 생선을 굽지 않고도 먹을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했습니다.

옷은 없어도 온화한 기후 때문에 살 수 있게 되어 기뻤고 대화의 상대는 없었으나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고 내 스스로 얼마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공황이 있었던 1930년대에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던 핑키 톰린(Pinky Tomlin)은 노래했습니다.

“사랑하는 님이 나를 바꾸었다네. 장밋빛 인생으로 나를 바꾸었다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나는 당신의 것이예요’라고 말할 때 나는 바뀌었다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지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희생시켰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이미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큰 축복을 풍성히 누리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예수에게 속한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세계적인 등산가들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할 때는 목숨을 걸고 올라갑니다. 본래 2400m 지점부터는 나무도 살수 없을 정도로 산소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호흡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 높은 산을 오릅니까? 그들에게는 그 높은 산을 정복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등산의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은 등산의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음악도 문학도 미술도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꼭 생업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 열린 세계가 주는 즐거움이 너무나 커 계속해서 그 세계를 탐닉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우리의 생명 속에 들어왔을 때 그 삶은 새롭게 됩니다. 삶이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이 복음을 받아드리기만 하면, 예수가 주는 참된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의 복음을 듣고 받아드리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부어 주십니다. 그것도 세상 마지막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나아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주십니다. 그 영생은 장래까지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여기에서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번역하여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으나 헬라어 원문은 현제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생은 영원히 계속되는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떠날 때 저 세상에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주님과 함께 승리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영원히 주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 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습니다.

2. 예수에게 속한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절).

이 말씀은 사람에 대한 심판이 예수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받아드리고 그 분을 중심으로 살고 그분에게 인생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두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반대하고 대적하는 사람은 이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사이 반기독교 운동을 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이 많은데 그들은 큰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과 차들로 늘 붐비는 미국의 한 대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해 오는 거대한 트럭에 치어 죽을 뻔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멀리서 이 광경을 본 중년 신사가 뛰어들어 청년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신사에게 박수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목숨을 건진 청년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나더니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로부터 한 달 뒤, 법정에서는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된 청년의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살인자에게 물었습니다. “판결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살인자인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습니다. “판사님! 판사님은 저를 아시지요!” 청년의 말에 법정 안은 조용해졌고, 판사도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청년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한 달 전에 판사님이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제가 트럭에 치어 죽을 뻔했을 때 말이예요. 제발 부탁이니 이번 한번만 더 살려주세요.”

방청석의 사람들은 모두들 판사의 얼굴을 주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판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그때는 내가 자네를 살려 주었었지. 그러나 오늘은 처지가 다르네. 자네는 죄를 지었고, 따라서 더 이상 자네를 살려줄 수가 없네. 지난번에는 내가 자네의 구세주가 되었었으나, 오늘은 심판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나님은 많은 위험과 어려움 중에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하지도, 돌이키지도 않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심판주로서 우리 앞에 서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판단하는 시금석이 되고 그에 따라 모든 사람이 생명과 심판으로 분류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부흥사 가운데 찰스 피니라는 분은 본래 법학을 공부하는 변호사 지망생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피니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왜 법학을 공부하느냐?” “예,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변호사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돈을 벌며 잘 살려고 합니다” “잘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그렇게 살다가 죽지요” “너는 죽은 다음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을 자신이 있느냐?”

그 때 피니는 그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그는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면서 기도하여 영생에 대한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뒤 그는 법학을 신학으로 바꾸고 영생운동, 생명운동, 부흥운동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구원시켰습니다.

우리도 이 피니와 같은 영적인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영생의 길보다는 심판을 택하여 살고 있습니다. 세속적입니다. 물질중심입니다. 우리는 예수 중심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3. 예수께 속한 사람은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집에서 떠나 예수를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행로는 너무 초라하고 고단하였을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세상적으로는 너무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감동했던 사람들은 행복했을 것이나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후 그들의 전도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고생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롯의 칼에 의해서 목이 달아났고 다른 사도들은 로마 당국과 유대 종교 권력에 의해서 환난과 핍박으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엎드릴 것이며 예수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없는 박해와 멸시 가운데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적고 영향력이 없다고 해도 또 실패와 불신에 직면했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무서운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궁극적인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좌절 시킬 수가 없습니다.

세상적인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의 일을 조금 지연시킬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패배시킬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잔인무도한 황제들인 네로나 도미티안 같은 이들은 그렇게 기독교를 박해했으나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기독교는 전세계로 퍼져갔습니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뿐만 아니라 전 우주만물이 영광을 돌려야 할 분입니다.

힌두교인으로서 기독교를 핍박하던 선더 씽(Sunder Singh 1889-1929)이 영국에 가서 신학교수를 만났습니다.

신학교수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힌두교를 기독교와 비교할 때 힌두교에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더 씽은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 교수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물었습니다. “말을 바꾸어 묻겠습니다. 기독교에는 당신이 이전에 믿던 힌두교와 특별히 다른 교리나 가르침이 있나요?” “아니요. 다른 교리나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개종시킨 것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도 교수는 만족하지 않고 “내가 질문한 것이 바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내가 묻는 것은 당신을 기독교인으로 만든 사상이나 교리나 가르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미래가 있고 영생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에게 속한 자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귀한 상급을 받은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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