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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일하는 성도

관리자 2010-01-17 (일) 11:00 14년전 1341  

일하는 성도

요한복음 5:15-18

나폴레옹 장군은 부하들에게 아주 엄격했습니다. 그는 명령을 어긴 자신의 부하들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호하게 처벌하곤 했습니다.

러시아 원정에 나선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오늘밤 러시아군의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 자기 위치를 잘 지키도록 해라. 명령을 어긴 자는 내일 총살형에 처할 것이다.”

그날 깊은 밤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사령관이 순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한 병사가 총을 가슴에 품고 깊은 잠에 빠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병사 옆에서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잠에서 깬 보초병은 소스라치게 놀라 먼저 무릎을 꿇고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한참 보초병을 바라보던 나폴레옹은 총을 건네주며 “너와 나 밖에 이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난 너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고 나서 사라졌습니다.

그 날 아침, 러시아와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점점 추위에 약한 프랑스 군이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한 병사가 갑자기 적진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모습에 다른 병사들도 힘을 내 파죽지세로 공격해서 대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끝난 뒤 나폴레옹은 그 병사에게 상을 내리기 위해서 찾았으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시신이라도 찾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나폴레옹 장군은 그 병사의 시신을 보고 놀랐습니다. 새벽에 자신이 보초를 서 주었던 바로 그 병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병사는 나폴레옹 사령관의 용서에 감동하여 자기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친 것입니다. 나폴레옹 사령관의 용서가 이런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그 험한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셨건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오셔서 베데스다 못에 가서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이건 절기이건 38년이나 된 사람이 병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냉정하고 험악한 눈초리로 대했습니다. 그들은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트집을 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환자가 일어나 침상을 들고 간 것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범한 것은 아닌지 따지고 싶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이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안식일은 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안식일에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동물도 다 쉬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준수에 관한 유대인의 율법은 아주 엄격합니다.

한 한국인 신학생이 이스라엘 유학중에 겪은 일입니다. 성공적인 수술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 신학생의 아내는 예루살렘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수술 후 며칠이 지나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간호사가 회진하며 환자들의 상태를 검진하고 체온 혈압 등을 기록하러 병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랍인 간호보조가 함께 따라 들어왔습니다. 유대인 간호사는 아내의 체온을 재더니 아랍인 간호 보조에게 체온을 적게 했습니다. 혈압을 재더니 마찬가지로 혈압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매일 혼자 들어와 체온과 혈압을 잰 후 자기가 직접 적더니 그날따라 아랍인 간호 보조를 데리고 들어와 그녀를 시켜 체온과 혈압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엔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아랍인을 쓰도록 시키는 것이 위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간호사는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면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일하시고, 38년 된 병자도 일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병 고침 받은 사람에게 누가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사람은 고침을 받았으나 곧 큰 화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율법에 “만일 누구든지 고의로 안식일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 집으로 무엇을 들고 가는 자는 돌로 쳐 죽일지니라”고 했기 때문에 병 고침 받은 사람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15절)고 말하여 예수께 안식일 계명을 어긴 죄의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께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으시고 일하고 계시므로 자기도 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쉬지 않으시고 일하십니다. 영원히 일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해도 계속 빛을 발하며 강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출생과 사망의 행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안식일에도 계속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러하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계속 일하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구원 사역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일은 귀한 것이고 축복입니다.

 

2. 예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하셨는데 이 말에 유대인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돕는다는 것이 중요하지, 돕는 날이 무슨 날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연히 도와야 됩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 주심으로 위급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인간의 고통과 근심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웃을 돕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예수는 안식일에 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예수는 지금도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일을 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지방에 매일 철길을 걸어 통학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철로를 지날 때 어김없이 기차가 지나갔습니다.

그날도 소년은 철로를 따라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지난 밤에 내린 폭우로 철로가 끊어졌습니다. 소년이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시간을 보니 기차가 지나갈 시간이었습니다.

소년은 기차를 멈추게 할 방법을 생각했으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소년은 자기 셔츠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가방에서 연필 깎는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의 넓적다리를 찔러 흘러나온 피로 흰 셔츠를 붉게 했습니다.

소년은 셔츠를 흔들며 기차가 달려오는 쪽으로 뛰었습니다. “스톱, 스톱” 기관사는 붉은 옷을 흔들며 달려오는 소년을 보고 급히 기차를 세웠습니다. 기차는 멈추었고 기관사가 내려와 보니 철로가 끊겨있었습니다.

그런데 피를 많이 흘린 소년은 안타깝게도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승객들은 기관사가 그 소년을 부둥켜 앉고 “너의 핏 값으로 우리가 살았다”고 말하자 함께 머리를 숙였습니다.

죄를 사하기 위해 아무 댓가도 없이 흘리신 예수의 피는 지금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하시고 ‘영원히’ 일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영원히 일하십니다.

 

3. 우리도 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업과 직장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니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을 만큼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봉급보다 더 일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기가 일하는 것으로 자기 가족을 살리기 때문에 자기 직장과 사업에서의 일은 신성한 노동입니다.

그러나 사업과 직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위한 생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배려의 마음입니다.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한편의 공익광고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신문 배달원이 떨어뜨린 신문을 대신 던져주는 시간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 23초, 버스에서 벨 대신 눌러주는 시간 4초, 직장에서 야근한 후배를 격려하며 커피 타 주는 시간 27초가 소요됨으로 불과 하루 1분이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아무리 이 세상 살아가기가 각박하고 인심이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광고 속 아저씨같이 친절하고 따뜻한 분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차림이 누추한 할머니가 버스를 타고는 돈이 없어 쩔쩔매며 운전기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버스에서 내릴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교복 입은 학생이 나서서 만 원짜리를 요금 통에 넣고는 운전기사에게 “아저씨, 이걸로 할머니 요금하시고 남는 돈으로 돈 없이 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차비로 써주세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순간 버스운전기사와 승객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의 버스로 돌변했습니다.

각박한 세상살이 가운데에서 너나없이 먹고 살기에 바빠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베푸는 ‘짧은’ 순간의 배려는 누군가에게는 ‘큰’ 배려가 될 수 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미안하지 않도록 재치 있게 던지는 기분 좋은 한마디 말과 함께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20초의 배려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듭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자신의 안전이나 위험을 생각하기 이전에 사람을 먼저 구하자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는데 걸린 시간이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보도에서 짧은 시간의 배려로 인한 기적이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우리도 주위를 한 번 둘러봅시다. 나에게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에게는 미미하여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이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반목과 다툼의 삶 가운데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요 온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작은 실천이 하루 24시간, 즉 1,440분 중에서 1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내가 가진 가장 작은 것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막 떠나는 기차에 인도의 지도자 간디가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기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이유를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웃을 배려하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말타기와 활쏘기였습니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습니다. 왕은 문제를 냈습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 키가 커야 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텐데....’라고 생각하며 제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그 20명 중에는 교회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 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교회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 패로는 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때 나무십자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십자가다!” 그 후 패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예수의 나무십자가로 비유되는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웃을 위하는 삶 중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 전도처럼 귀한 일은 없습니다. 복음 전도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는데 우리는 그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헤롯왕은 자신이 야고보 사도를 죽였을 때 유대인들이 기뻐하니까 베드로 사도마저도 죽이려고 했다가 충이 파먹어 죽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영혼구원입니다. 이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중요합니다. 금년에는 적어도 두 명 씩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받아 항상 일하는 성도가 되어 주의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충직한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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