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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6.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보라 네 어머니라

관리자 2010-05-16 (일) 11:00 13년전 1390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25-27절

제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무렵의 어느 비 오는 날 학교 기숙사 방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우리 어머니가 고향 큰 밭에서 뙤얕볕 아래 일하시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선선한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구슬땀을 흘리며 쉴 틈도 없이 일하시는 것이 눈에 선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학비를 준비하기 위해서 편히 쉬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논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마치 머슴처럼 일했습니다. 아니 머슴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인 저는 그 어머니를 언제 한 번도 제대로 마음 편하게 모시지 못했으니 너무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저는 어버이 주일이 오면 어머니께 잘못한 것이 생각나 너무 가슴 아파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어머니께 효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효(孝)는 우리 조상들이 오래 전부터 부모를 섬길 때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왔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때 효녀 지은은 나면서부터 효성스러웠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몸이 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서른 두 살이 되도록 시집도 안가고 어머니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살림이 어려워 날품팔이로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 하였으나 빈궁을 견디다 못한 지은은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노릇 하기로 하고 쌀 10섬을 얻었습니다.

부잣집에서 종일 일하고 날이 저물어 집에 와서 어머니를 봉양한지 며칠이 지난 뒤 어머니는 “지난날에는 빌어온 밥이라도 그 맛이 달더니 요사이는 밥이 전처럼 달지도 않구나! 오히려 밥을 먹으면 칼로 간장을 찌르는 것 같으니 그 영문을 알 수 가 없구나! ” 지은이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나 때문에 종이 되다니 빨리 죽지 못한 것이 원망스럽구나!” 하고 소리내어 통곡하자 지은이도 어머니를 붙들고 울음을 터트리니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집 앞을 지나던 효종랑이란 화랑도가 그 사연을 알고 자신의 부모님께 말씀드려 쌀 백 섬과 의복을 보내 종으로 산 주인에게 갚아주어 양민이 되게 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화랑도들이 많은 곡식을 보냈고, 소문을 들은 왕은 벼 오백 섬과 집 한 채를 내리고 부역도 면해주고 도적이 침입치 않도록 군사를 보내 지키도록 하고 그 마을을 효양방이라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 당신의 죽음을 아시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너무 죄송했습니다.

온전한 인간의 성품을 가지신 예수께서는 어머니 앞에서 먼저 죽는 것이 크나큰 불효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머니께 효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는 것이 못내 죄송하셔서 십자가 밑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며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고 하시고 이어서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7)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긴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얼마나 어머니에 대한 관심과 효성이 지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의 효 사상을 다시 한번 되살려서 우리의 부모님들께 효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복음 안에서 참된 효도의 근본적인 원리를 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인의 부모 공경은 복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는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 중 첫 번째는 부모 공경의 계명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정이 복 받고 사는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녀가 부모 공경을 잘 하면 장수하게 되고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잘 되는 것은 부모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부모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공경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공경하라’ 말씀에서 쓰는 단어와 똑 같은 단어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부모 공경을 하나님 공경이나 비슷하게 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인데 이런 분에게 쓰는 공경이라는 말씀을 부모에게 썼으니 부모 공경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없수이 여기는 사람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엘리멜렉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두 아들을 장가 보내 두 자부를 얻었습니다. 자부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고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그 때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렇게 살 바에야 두 자부를 친정으로 보내고 고국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큰 자부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작은 자부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룻이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은 마치 신자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똑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베들레헴에 따라 왔으나 시어머니는 아무 것도 없어 그만 이삭을 주어서 먹고 사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겼고 그것을 하나님은 좋게 보시고 그 지역의 듬직한 사람 보아스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좋은 가정, 다윗의 가문의 할머니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실상 모압 여자인 룻은 이스라엘 민족에 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효심으로 그녀는 이스라엘 왕가의 할머니가 되는 복 있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도 부모님 공경을 신앙처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되는 길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부모 공경은 신앙생활의 표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부모공경이라는 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부모 공경은 옛날 농경 사회에서나 있었던 도덕과 윤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나 있었던 대가족제도는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져 핵가족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최첨단 IT 산업 시대에 돌입해 핵가족도 서서히 해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교육에는 열을 올립니다. 좋은 대학에 넣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아니 임신했을 때부터 교육을 시키느라 바쁘게 돌아갑니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녀들의 성공과 출세만이 관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갈등하고 이혼이 속출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효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1-2).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우리의 자녀들이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게 하려면 하나님이 중요하게 알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부모 공경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근래에 들어 와서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이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마저 부모 공경의 도리를 잊어 버리고 세상 것을 추구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 나라는 노령화 사회에 접어 들었기 때문에 노년의 인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노인’을 부모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 노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면 어떻게 우리가 노인이 된 부모를 대하는 가를 알 수 있어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반평생을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한 노인이 그동안 소홀했던 자기충전을 위해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나간 곳은 세계적인 명문 ‘하바드대 대학원’.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국내에 있는 ‘하바드대 대학원’은 ‘하’는 일도 없이 ‘바’쁘게 ‘드’나드는 곳입니다.

하바드대 대학원을 수료하고는 동경대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동’네 ‘경’로당입니다. 동경대 대학원을 마치고 나니 방콕대 대학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에 ‘콕’ 들어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감투도 몇 개 얻었습니다. 처음 얻은 것은 ‘화백’. ‘화’려한 ‘백’수란 뜻입니다. 두 번째 감투는 ‘장노’입니다. 교회와 상관없는 말로 ‘장’기간 ‘노’는 사람입니다다. ‘

장노’로 얼마간 있으니 ‘목사’가 됩니다.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불교적인 감투도 하나 썼습니다. ‘지공선사’. ‘지’하철 ‘공’짜로 타고 경로석에 정좌하여 눈 감고 참 ‘선’하니 지공선사입니다.

이상은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우리나라 은퇴자들의 ‘은퇴 후 모습’입니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이 부정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변한 사회 시스템에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이전 농경사회에서 공경의 대상이었던 노인은 이제 무기력하고 능력 없는 보호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가정에서는 부모, 동네에서는 어른, 사회에서는 지도자로서 풍부한 경륜을 바탕으로 후대에 전통을 전수하는 한편 사회 구성원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도래함에 따라, 생산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산업사회에서 느린 노인은 더 이상 인력으로서 활용 기회마저 상실하게 되었고, 부모로서의 위엄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도 노인들의 지위 상실에 한몫했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성적을 좌우한다지만, 자녀가 장성하면 부모의 경제력이 효도의 잣대가 되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입니다.

얼마 전 여러 나라의 부모와 성장한 자녀 관계를 조사한 내용을 보면, 부모가 경제력이 있어야 자녀가 자주 찾아오는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일수록 자녀가 외면하는 일이 많다는 결과는 슬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해도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시대의 소금이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 되는 길은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부모 공경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 복을 주시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챙기신, 효성이 지극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런 모습을 모두 닮아야겠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어머니를 모실 제자를 정해 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서 효를 다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그의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고 아들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시고 키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어머니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자식에게 줍니다. 우리 어머니를 보면 자식의 공부를 위해서 변변한 옷 한 벌 사 입지 않으시고 좋은 음식을 잡수시지 않고 맛이 나는 음식은 다 자식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우리 어머니가 생전 처음 서울에 올라오시는 날이었습니다. 밤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신 것입니다. 저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서울역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냥 집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무엇을 이고 들고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못난 생각에 이렇게 남루한 옷을 입고 오셨으니 어떻게 친구들에게 소개하여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한심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 기숙사에 갔더니 선후배들이 모여 우리 어머니가 오셨다고 반가워하고 큰 절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릅니다.

저는 그 때 어머니의 입성이 초라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자식으로서 얼마나 한심한 지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일제 시대 이흥렬이 일본에 음악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피아노가 없어서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연습해서 오는데 이흥렬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가난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곳 일본까지 와서 음악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피아노가 없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는 피아노를 가진 집은 별로 없었던 때이고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이흥렬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편지를 받고 산에 올라가 솔방울을 따서 팔고 팔아 피아노 한 대 값을 겨우 마련하여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이흥렬은 그 돈으로 피아노를 사서 연습하고 또 쳤습니다. 그는 피아노 값을 마련하기 위해 솔방울을 따서 한푼 두푼 모아왔을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니의 마음은 가히 없어라“

우리는 부모님의 그 은혜를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도 모친 마리아에게 죽음의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해 효도를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라고 했습니다. 즉 효는 모든 행위의 근본입니다. 믿음의 행위에 있어서도 효는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버이날을 맞아 신앙 안에서 효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새겨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효도는 인간 생활의 근본이면서 바로 믿음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부모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부모 공경을 통하여 하나님 공경을 더욱 더 깊이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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