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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8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풍성한 삶

관리자 2010-07-18 (일) 11:00 13년전 1292  

풍성한 삶

 

요한복음 10:7-10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독수리와 닭’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이 인근의 산에서 발견한 독수리 알을 암탉이 계란을 품을 때 살짝 집어 넣었습니다.

드리어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할 때 독수리도 부화했습니다. 이 새끼 독수리는 자기도 병아리라고 생각하여 병아리와 똑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독수리 하나가 닭장의 상공을 멋지게 맴돌다 지나갔습니다. 그 멋진 모습을 새끼 독수리가 보며 그 큰 독수리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새끼 독수리는 “나는 저 큰 독수리와 닮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나는 내 모습이 병아리하고 왜 닮지 않았는가 고민했었는데! 사실은 나는 창공을 날고 있는 저 어마어마한 독수리와 같구나!” 라고 생각하고 비로소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참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남'에게로 열린 존재입니다. '남'을 향하여 자신을 열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수 있게 됩니다.

'나'는 '남'과의 관계에서 '나'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타자인 하나님을 발견할 때 참된 '나'를 발견하고 참된 '나'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은 참된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장소입니다.

'나'와는 달라 영원한 남으로 제쳐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나'와는 달라 손가락질까지 할 수 있는 창녀, 죄인, 세리, 내게 상처를 주는 진저리쳐지는 원수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일지라도 결코 소원히 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강조하신 것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나’는 참된 ‘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소외감, 그들의 죄스러움을 외면하고서는 ‘나’는 ‘나’로서 살 수 없습니다. 참된 ‘나’의 정체성은 ‘남’과의 관계 위에서 정립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가슴속에 참된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남'을 안고 살아갑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남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사는 듯한 이기적인 인간 안에도 참된 '나'는 숨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는 '남'을 향해 열어 놓아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남’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절대적인 ‘남’으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열 때 신자는 비로소 참된 '나'로 하나님의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참된 나를 발견하고, 그런 참된 삶을 허락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7절)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 형태의 양의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용’으로서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라도 그들의 양들을 밤이 오면 다 그곳에 넣었습니다. 이러한 양 우리에는 튼튼한 문을 두었는데 문지기만이 그 열쇠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형태의 양 우리가 있는데, 따뜻한 계절에 양을 고원에서 방목하여 밤에 마을로 돌아올 수 없을 때에는 그 고원에 양 우리를 두었습니다.

이런 양 우리는 벽으로 네모나게 둘러싸 만들었습니다. 이런 양 우리는 양이 출입하는 입구에 목자가 가로질러 누웠습니다.

목자가 입구에 가로 질러 눕기 때문에 고원에 있는 양 우리의 양은 목자를 뛰어 넘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밤에 양 우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되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양 우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곧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8).

우리는 예수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죄악된 인간을 화해시킨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예수처럼 존귀한 분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배타적이라고 싫어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요청이기 때문에 이것은 배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죠지 부시 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일했던 흑인 여성 라이스는 흑인 목사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저는 신앙심이 매우 깊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결혼한 저는 공적인 생활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믿음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처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참된 자아를 찾고, 기쁨이 넘치는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등서초등학교 고갯길에서 큰 글씨로 엉성하게 인쇄되고 맞춤법이 엉망인 전도지 1장을 주웠습니다. “예수를 미드면 맘이 평안함을 어더요/수고롭고 괴롬많아 짐무겁게 진자여 빨리 내게 나아오라/평안함을 주리라/하신대로 나는 믿고 평안함을 어더/전도합니다/ 미드면돼요/미드세요.”

이 전도지를 나누고 다녔을 사람은 사실 자신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셈이 되었겠지만 이 사람은 그것이 문제되지 않을 만큼 예수를 만난 기쁨이 넘쳐 흘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소유한 평안은 혼자서 가지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전도지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 전도지는 교회의 이름이 적힌 그런 전도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도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가득한 전도지였습니다.

어느 교파의 사람이 되기 전에, 어느 교회의 사람이 되기 전에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맨 앞자리에 모시지 않는다면 교파도 교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2.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생활이 보장됩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영적인 구원만을 얻는 것으로 아는 신자들을 저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은 어려움 없이 출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은 단지 ‘영적’으로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꼴,’ 즉 물질적인 축복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부자라고 하면 곱게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 비리가 있고 불법으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겠지라고 생각하여 ‘부자는 나쁘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분명 ‘편견’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사실’인 것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부자들의 부의 축적은 온갖 ‘특혜’로 인해 이루어진 기형적이고 불법적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부자를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과 맞물려 ‘기복신앙’을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미개한 것으로 생각하는 크리스챤이라면 부에 대한 편견은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복신앙’과 ‘기복주의적’ 신앙을 구별해야 합니다. 기복신앙은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은 분명히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 알고 세속적인 복 이외의 것들에는 도무지 하나님에게서 관심이 없는 기복주의적 신앙은 우리의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축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등 믿음의 조상들에게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다”(고후9: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물질적으로 축복하셔서 착한 일을 많이 하게 하시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원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우리가 물질적 축복을 간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자라고 신명기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신28:6).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출입을 지키신다(시121: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그 분 안에서 행할 때 생활의 안정이 보장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하면 우리가 무슨 염려가 있겠으며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데도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진실로 마음에 영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는 불평과 불만만 나옵니다.

사람이 태양을 등지면 얼굴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태양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모시고 다니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노래를 통해서 구세주 예수를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고 예수의 영광이 나타나면서 우리의 삶도 그렇게 무게가 있게 됩니다.

세상에서 지식이 없고, 돈도 없어 비천한 사람은 예수로 자기 인생을 채우면 존귀해집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살고, 전도와 선교에 앞서는 거룩한 생활을 하면 아무런 물질적인 보상이 없을지라도 그것 자체로 풍성한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3.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은 물건이 많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면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우리 교회에서 우리 교회 창립 40년을 기념해서 개안수술 100명을 위한 헌금을 했습니다. 100명의 수술비가 만만치 않기에 정말 그런 돈이 모금이 되겠느냐는 우려 섞인 말이 나왔을 때, 준비위원장인 이호성 장로는 “우리가 다른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모두 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인데 어찌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것은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실지로 하나님은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의 삶 속에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력이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최인호의 [사랑의 기쁨]이라는 소설에서 보면 20대 후반에 이혼하고 30년 동안 홀로 살던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유품을 챙기다가 편지 하나를 보고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딸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 딸은 어머니가 20여년 동안 사랑했던 그 남자를 만났습니다. 어머니와 그 남자 두 사람은 무척 사랑하는 사이였고, 두 사람이 재혼을 하는데 방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중후한 인격을 가진 대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이혼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둘은 헤어졌고 10년간 어머니가 죽기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편지도 전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에게 방해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데도 말입니다.

딸은 어머니가 사랑했던 독신 교수에게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때 그 교수는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써서 보낸 어머니의 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로 당신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저는 어머니로서 제 딸을 사랑하는 사랑이 더 큽니다. 저는 선생님보다 제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제 전화도 하지 말고 편지도 하지 마세요”

그 딸은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혼했다고, 그래서 딸의 인생을 망쳤다고, 또 아버지가 외로움으로 병들어 죽게 했다고 대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달라졌습니다. 빛이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딸을 위해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과 관계를 끊고 딸을 위해서 살았던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대단히 힘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안일과 육신의 쾌락과 세상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어머니는 교수와의 사랑이 고귀했지만 그 딸을 더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연인에게 달려가지 못하게 했고, 그리움과 외로움의 세월을 견디게 했습니다.

사랑은 인간을 새롭게 합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항상 반항적이었으나 어머니가 죽은 다음 어머니 편지를 보고 달라졌습니다. 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삶과 행복을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행하게만 보였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주님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자라면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마땅히 주님을 경배하고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웃에게 베풀면서 살고 그분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목자일 뿐 아니라 물질적인 목자도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 주님께서는 영육간에 많은 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영육간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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