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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0.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나를 따르라

관리자 2011-10-30 (일) 11:00 12년전 1346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20-24절

 

국적이 프랑스인 위대한 인물 가운데 이름이 동일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프랑스어로 ‘알베르’(Albert)인데, 한 사람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이고, 또 한 사람은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입니다.

철자는 똑같이 A, l, b, e, r, t 이지만, 프랑스어로는 ‘알베르,’ 독일어로는 ‘알버트’라고 읽습니다.

출생은 슈바이처가 까뮈보다 앞서지만 그들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까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났고, 슈바이처는 알자스에서 태어났으나, 이들의 국적은 모두 프랑스입니다. 둘째, 둘 모두 ‘알베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둘 다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까뮈는 노벨 문학상을,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받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습니다. 넷째, 그들 모두 예술적인 자질이 뛰어났습니다.

까뮈는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페스트]의 작가였고, 슈바이처는 천부적인 파이프오르가니스트였고, [바흐전], [예수전] 등을 남겼습니다.

이들에게는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까뮈는 알제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으며, 고학으로 알제리 국립대학 철학과를 나와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무신론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슈바이처는 프랑스령인 알자스에서 독일 국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 그리고 의학을 전공했고 파이프오르가니스트로 활약했습니다.

또 까뮈는 가난하게 자라 늘 결핵을 앓으면서 살았고, 47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슈바이처는 50년 동안이나 아프리카 랑바레네에서 의료 선교에 힘쓰다가 90세에 세계인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신학과 철학과 의학과 음악의 박사학위를 가진 보기 드문 석학이었지만, 명예와 부를 다 내어 버리고 그렇게도 차별 받던 흑인들을 위해 인생을 모두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되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보면서 물질문명의 타락상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물질문명은 토끼처럼 빠른데 도덕적 문명은 거북이처럼 느리다”고 말하며 물질문명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생명을 경외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 상금을 다 털어 한센인 촌을 세웠습니다. 노벨 평화상은 당연히 그에게 주어져야 했습니다. 그의 식구들인 아내와 딸 등이 그의 삶을 따라 그들의 인생을 헌신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영등포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 의사는 바로 영등포 쪽방촌에 자리잡은 요셉병원의 병원장인 선우경식 의사입니다. 안타깝게도 선우의사는 2008년에 소천하셨습니다.

선우경식 의사는 미국의 최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던 1983년 어느 날, 전문의가 없으니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도와달라는 후배의 부탁으로 신림동 난곡입구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했습니다.

그 진료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1987년 영등포 쪽방촌에 요셉의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극빈층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미국 유학 후 교수 자리라는 것이 그에게 남아있었지만 평생 결혼도 미루어가며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하였습니다.

병원은 적자가 났지만, 쌀도 얻어오고 후원도 얻어왔습니다. 숱한 고생 끝에 그는 평생 43만명의 환자들을 조건없이 돌보았습니다. 노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과 윤락녀들과 저소득층의 환자들이 그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는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커다란 명예와 환호도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의학을 공부했을 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자 결심했으므로 평생 그것만을 지켜가며 살았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그는 고백했습니다.

선우경식 의사는 “가난한 환자들은 제겐 선물입니다. 의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환자들이야 말로 진정 의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슈바이처 박사나 영등포의 슈바이처인 선우경식 의사와 같이 헌신하는 길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비록 어렵더라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지금까지는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였으나 후에는 당신을 위해서 순교할 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질 때는 이미 베드로가 순교했을 때였습니다. 역사가들은 AD 64년, 네로 황제 시대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말씀에는 베드로가 사도 요한에 대한 주님의 예언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 당신이 제일 신임하고 사랑하는 사도 요한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21절). 자신은 순교하는데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은 순교도 당하지 않고 평온하게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 베드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상 주님을 위한 고난이야 말로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3-14).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할 것은 그의 선교 후반기였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사명을 위임 받을 때 될 수 있으면 고난 없이 주의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 그러면 자신만 고난 받고 나머지 제자들은 고난 없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불만이 마음 속에 꿈틀거렸습니다.

실상 주님의 제자들은 얼마나 경쟁 의식이 많았습니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 오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면 자기 형제들이 주님의 오른 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니 제자들이 얼마나 반발했습니까?

제자들은 그렇게 서로 경쟁의식이 많았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경쟁 의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같은 학번끼리 취직시험, 진급시험에서 친구를 이겨야만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동기생들끼리의 경쟁에서 이기면 그런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글로벌한 시대이기 때문에 세계와의 경쟁을 뚫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2절)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오래 살게 해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남과 경쟁의식에 매여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경쟁의식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섬김과 사랑의 대상이지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쟁력으로 평가합니다. 또 경쟁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실패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쟁하며 살아보신 분들은 알 수 있듯이 그 삶이 고단합니다. 쉼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도 비교 평가되는 경쟁 사회 속에서 힘들어 합니다. 그러다 쓰러집니다. 그러면 “아, 이건 아니다.” 하고 포기할 만한데도 여전히 주자를 바꾸어 또 달리게 합니다.

우리는 경쟁하러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사람을 붙여주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고 붙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인관계의 기본원칙입니다.

물론 경쟁을 통해 성과를 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사람은 경쟁을 부추기면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경쟁심이 일을 하는 동기인 사람은 몸이 상하도록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아무리 경쟁을 시켜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으면 경쟁하지 않고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며 가장 좋은 몫을 예비하여 주신 줄 믿기에,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충성합니다.

오늘 우리가 열심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동반자입니다.

경쟁할 것인가요, 사랑할 것인가요?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들이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베드로가 사도 요한을 경쟁자가 아니라 사역의 동반자로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명을 맡았습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 순교하는 것보다 더 영광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영광스럽게 순교한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만 매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취지에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주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주님은 그 자리를 떠나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그 길을 따라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실상 인간은 세상적으로 그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을 때만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만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가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도 그 길을 따라 영원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선교의 주역으로 우뚝 섰습니다.

베드로가 선교의 주역으로 우뚝 선 것은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비단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헌신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참된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과 평안과 기쁨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영원한 나라가 보장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빈 무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주이며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영광중에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고대합니다. 우리도 이제 주님을 따릅시다. 그 길을 따라 한 사람이라도 주님께 인도합시다.

다음 주일은 전 성도가 한 사람이라도 추수하는 총동원 주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의미에서 한 사람을 인도하여 주님에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 무릎을 꿇는 자만이 영광의 그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고, 둘째,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입니다. 이는 전도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는 밤을 새워서까지 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 예로, 멋있는 사람과 막 교제를 시작한 처녀를 보십시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신과 교제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 관해서 만큼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그 놀랍고도 감격적인 복음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자문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총동원 주일을 맞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헌신적으로 감당하여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이웃은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동역자로서 사랑의 상대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복음을 전하여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복음을 전하여 이웃을 온전하게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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