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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5.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관리자 2011-09-25 (일) 11:00 12년전 1230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요한복음 20:19-23절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이 살던 마을은 주정뱅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밤낮으로 술주정을 한 결과 가정이 파괴되는 집이 점차 늘어갔습니다.

다윈은 그 마을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집을 개방하고 술주정뱅이들을 고쳐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페간이라는 사람이 이사 왔는데, 그는 술주정뱅이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이 교회에 모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술마저 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년 뒤 다윈은 페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당신은 몇 년 동안 우리가 노력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소. 우리는 결코 술주정뱅이를 교화시킬 수 없었는데, 당신의 도움으로 우리 마을에는 술주정뱅이가 사라졌소.

과학이 인생 가운데 자리는 했지만 그것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었는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당신은 증명했소.“

무신론자요 유물론자인 다윈의 능력으로는 술주정뱅이 한 사람도 교화시키지 못했는데 페간이라는 전도자 한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자 많은 술주정뱅이들이 술을 끊었고, 그 결과 마을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예수께 나올 때만이 삶의 진리를 맞볼 수 있습니다. 예수 없는 세상은희망이라고는 없는 절망의 세계입니다. 예수 없는 세상에도 희망이 있다고 하지만 그 희망은 거짓된 희망일 뿐입니다.

에수께서 십자가에 죽은 다음 제자들은 스승과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 보여 장래에 어떻게 하고 살 것인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독기를 알고 있었기에 두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렇게 죽이려고 하더니 끝내는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이제 죽음이 그들의 차례로 좁혀 올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에 산헤드린의 졸개들이 그들을 잡으러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께서 갑자기 그들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19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선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하나님께서 외아들인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당신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오늘날 세상 삶에 젖어 세상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도 오셔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바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사명입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말씀을 ‘교회의 헌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만인을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메시지를 누가 전하지 않으면 만인에게 전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28:19)고 말씀하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겼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곳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엡1:23, 고전12:12)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입이 되어야 하고, 심부름하는 발이 되어야 하고, 예수의 역사를 행하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교회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얼마나 큰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교회가 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맡긴 사명을 감당한다는 점에서 얼마나 큰 사명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를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탈 현상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부끄러운 일 때문에 교회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개혁하여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참된 교회을 모습을 속히 회복하여 주님의 복음을 온 누리에 전하는 사명을 아름답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1182년 이태리 중북부 아시시에서 부유한 상인이 아들로 태어나 20대 후반에 성당에서 신부의 설교를 듣던 중 사도들처럼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10:9-10).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의 선교는 먼저 청빈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동성 있는 선교였습니다.

그는 수도원 안에 안주하면서 영성운동에만 매달리던 전통을 접고 민중들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또한 그는 지금의 교회와 협력하여 선교했으며, 혼자만 하는 전도가 아닌 다른 수도사들과 동역하는 공동체 선교를 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선교를 했습니다. 그의 선교의 원리는 청빈한 삶, 겸손하고 단순한 삶, 기도에 힘쓰는 삶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주님의 삶을 그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자 주님의 말씀의 전파력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프랜시스처럼 청빈하게는 못 살아도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만은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프랜시스처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행함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생각의 변화, 말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삶 속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질책을 받아야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잘 믿는다고 자만했던 바리새인들입니다.

주님이 책망했던 그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소홀히 했습니까? 정기적으로 금식을 안했습니까? 십일조를 제대로 안 바쳤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눅 18:12), 613개의 율법을 지키고, 그것도 부족해서 39개의 더욱 엄격한 율법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 이상 경건할 수 없고, 그 이상의 종교인이 없을 듯싶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요7:19)고 하셨고, “외식하는”(마23:23) 자들이라 하셨으며, 그들보다 의가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5:20). 그들 가운데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마3:7)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엄청난 독설을 받아야했습니까?

첫째, 그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 즉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기 때문입니다(마23:23).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면서도 매사에 믿음으로 하지 않았고, 사랑으로 하지 않았고, 소망 중에 인내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말, 그들의 행동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둘째, 사람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막7:8)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막7:1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경배라고 하셨습니다(막7:7).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마23:2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자랑하는 지식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익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했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참 진리이신 주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귀신들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7:34)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눈먼 장님이란 사실을 몰랐고, 그들은 자신들이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진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무식했더라면 좋았을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로 잘났다고 뻐기고 다니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주님을 바로 알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기초해 정의를 실천하고, 긍휼을 베풀며, 믿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번 총동원 주일을 맞아 정의와 긍휼과 믿음, 즉 의(義)와 인(仁)과 신(信)으로 주님을 증거하여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초청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말만, 즉, 거짓과 허영과 자기과시로 주님을 증거하여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행동하여 주님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행동으로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바로 교회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복음 전도의 파송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을 보내는 파송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파송 받아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 메시지를 뒷받침해 주는 능력과 권위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파송 주체이고, 선교사가 전해야 할 메시지를 전수하며, 그 메시지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주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교회도 없고, 교회의 메시지도 없고, 메시지의 능력도 없습니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예수에게서 나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 예수를 전하기는 하나 예수는 없고 비즈니스와 인간들의 소리만 있는 교회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예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서 있으려면 예수가 당신을 보낸 하나님께 순종한 것을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했습니다. 또 자기를 부인했으며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사랑을 바쳤습니다.

그 완전한 순종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맡긴 인류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께 완전히 순종하고, 완전한 사랑을 해야 주님의 도구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만약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만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온전하게 전하는 교회에 예수께서는 놀라운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2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광경은 마치 에스겔이 죽음으로 말라빠진 많은 뼈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기로 살아나는 광경을 보는 듯합니다.

에스겔은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는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37:9). 그 때 생기가 죽은 뼈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모습처럼 절망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일어나 목숨까지도 내놓고 복음을 전하는 주의 군대로 부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아직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이었지만 제자들은 이 놀라운 자리에서 새 능력을 얻고 일어났습니다.

이런 성령의 놀라운 숨길을 그 때 사도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주어진 것이요, 오늘 우리 교회에도 주어진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성경 지식 정도가 아닙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연약한 것은 다름 아닌 이 성령의 능력이 결핍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의 은사는 하늘의 보좌에서 행사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힙입어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하늘의 보좌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아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여 이번 총동원 주일에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직 그 능력이 없습니까? 하나님께 구하면 주십니다. 그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간구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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