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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8.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최후의 승리자 예수

관리자 2011-08-28 (일) 11:00 12년전 1218  

최후의 승리자 예수

 

요한복음 19:28-37절

 

2차 대전 때 중대한 임무를 띤 한 척의 작은 배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려고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특수한 임무를 띤 상황이었기 때문에 군함으로 갈수 없었고 또 적의 눈을 속여야만 했기 때문에 전쟁과 상관 없는 민간 선박을 골랐습니다.

그 배는 크지 않은 선박이어야 했고 또 특수 임무를 위해 위장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소형 선박이 그 크고 넓은 바다를 어떻게 안전하게 건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불안했지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에 항해를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떠날 때 한 가지 위로가 된 것은 “우리가 항상 곁에서 함께 할 것이기에 안심하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배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출항했습니다. 가는 동안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적함으로부터의 위기, 환경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전문이 날아왔습니다. “우리가 곁에 있으니 두려워 말라.”

이 배는 무사히 미국 근해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배에서 멀지 않는 지점에 거대한 잠수함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모든 것이 종료되었고 안심하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잠수함이 떠오르자 그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이 어떻게 저렇게 큰 바다를 건널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잠수함이 보이지 않게 그들을 호위하며 곁에서 함께 있어 왔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였지만 잠수함의 보이지 않는 격려와 호위로 인해 그들은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성가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를 실감나게 해 줍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을 하자 천사는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또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도 십자가의 사형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가 목마르다”(28절)고 절규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서기 100년경에 쓰여졌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사상 가운데 영지주의가 있었는데, 영은 선한데 물질은 다 악하다는 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몸은 물질이고 물질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가현설은 예수는 하나님이기에, 인간으로서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가현설은 예수는 사람의 탈을 쓰고 왔으므로, 사람이 아니라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교리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일 뿐이며, 그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하였습니다.

가현설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발생한 극단적인 교리로서,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성육신의 진리로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아시고 더군다나 십자가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 3시(오전 9시)로부터 제 6시(오후 3시)까지 가장 뜨거운 시간 내내 쇠약하고 지친 채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 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락방에서 마지막 잔을 드시고 생기를 북돋아 주는 음료를 마시지 못하셨습니다. 예수의 지친 육체는 마지막으로 절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목 마르다.”

그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무거우면 그의 몸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을까요? 육체는 열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혀는 바싹 타 다 갈라지고 온 사지는 찟기어지고 있는 그 고통을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어 주었습니다(29절). ‘해면(Sea Sponge)’은 Sea Songe, 즉 바다의 스펀지라는 바다 생물로서 이름 그대로 보통의 인조 스펀지보다 물 흡수력이 3배나 뛰어나다고 합니다.

신포도주는 아마도 예수에게 감명을 받은 백부장이 준비해 둔 것이라 추측됩니다. 예수는 그것으로 좀 힘을 얻었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은밀한 봉사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특색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무아(無我)의 봉사, 즉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를 왜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병자를 도와주고, 김 못 매는 이가 있으면 김을 매주고, 추수를 미처 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가서 추수를 해주는 등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하와이에 한센병자들만 사는 섬에 가서 일생을 바친 다미안을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 일했던 슈바이처 박사를 왜 성자라고 합니까? 그것은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성인들은 모두 ‘내’가 없는 말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봉사는 귀하지만 그 봉사에 ‘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향기로운 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르는 봉사, 내가 없는 봉사. 이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루스 함스 콜킨(Ruth Harms Calkin)여사는 '나의 의혹(I wonder)'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로 힘쓴다면 우리도 이 시의 마지막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제가 어떻게 당신을 섬겼는지 아실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각광을 받으며

크나큰 열정을 가지고 당신을 섬긴 것을.

각종 선교 단체에서

제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당신을 위해 열변을 토했는지

당신은 아실 것입니다.

교제의 모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제가 얼마나 흥분하며 돌아다녔는지

당신은 아실 것입니다.

성경 연구 모임에서 제가 얼마나 진지하였는지를

당신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께서 물 대야를 지적하시고,

허리 굽고 주름 잡힌 노파의

딱딱한 발을

매일매일

그것도 계속해서,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알지 않는 방 안에서

씻기라고 요구하신다면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저도 잘 알 수가 없나이다.

제가 아무도 보지 않는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최후의 모습은 인간의 고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예수께서는 최후로 “다 이루었다”(30절)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패배감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승리의 외침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된 그 최초의 유월절 밤에 죽음의 사자가 돌아다니면서 애굽인들의 장자를 낱낱이 죽여 버린 것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취하여 문지방과 문인방에 뿌려 죽음의 사자가 그들의 집을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한 것은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유월절 어린 양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하면 며칠이 걸리더라도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그 시체를 방치해 두어 독수리와 까마귀와 늑대의 밥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나무에 밤새도록 두지 말라는 규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무에 달려 있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는 나무 망치로 때려 분쇄할 정도로 잔인하게 했습니다. 예수 곁의 두 강도는 그렇게 다 분쇄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예수는 그 나무 망치를 면했습니다.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월절 양은 그 뼈를 하나라도 꺾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민9:12). 이를 통해서도 예수께서는 유월절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기묘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몸을 분쇄하는 대신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렀습니다.

본래 죽은 시체는 피가 흐르지 않는 법입니다. 오직 시체의 심장이 파열될 때 피와 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군인의 창이 예수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최후로 당신의 심장까지 찢기면서 피와 물을 흘리셨습니다. 정말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흘리신 피와 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물은 세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피는 우리의 죄의 용서하는 속죄의 표시입니다.

군인의 창으로 인해 흘린 피와 물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의 물과 피는 우리에게 하늘의 가장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만세반석 열리니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494장)

 

주님의 종 된 우리도 주님처럼 각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즐거움으로 감당하는 성도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성도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 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너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이냐?”

그리고 주님은 그를 타일렀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것이란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속죄를 위해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달게 감수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의 험한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큰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며 이 시간 새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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