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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4.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하나님을 떠난 자

관리자 2011-12-04 (일) 11:00 12년전 1283  

하나님을 떠난 자

 

로마서 1:26-32절

 

여러해 전에 미국의 보스턴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 소머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 당국은 성탄절을 맞이해서 시청 앞에 아기 예수 탄생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누가 아기 예수 모형을 훔쳐 갔습니다.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멀리에서 온 동방박사들은 거기에 다 있었고 포대기와 말구유까지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있어야 할 아기 예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시 당국은 신문과 TV와 라디오를 통해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고, 가져간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아기 예수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거듭거듭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아기 예수를 훔쳐간 사람이 뒤늦게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 없는 성탄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에 우리나라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지금은 윤리와 도덕의식이 약하여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한 건물에 교회가 2개가 들어설 정도로 크게 번창하고, 장로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등 많은 발전을 하였지만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교회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온갖 도덕적인 타락으로 죄를 짓는 것은 그럴수도 있다고 용인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고 있으니 거기에 임할 하나님의 분노를 생각하니 무섭기만 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다음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세상으로 파송된 거룩한 공동체인데, 이제는 거꾸로 세상의 여러가지 죄악을 본받아 그것을 교회 속으로 들여와 거룩한 교회를 온갖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고 있으니 교역자의 한 사람으로 참으로 통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에 적이 올라와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에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교회에 아무런 목적 없이 나와 그냥 예배만 보고 나갈 것이 아니라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발견하고 사회로 나와 그 뜻을 행하여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을 발견하고 그 소명을 사회적으로 실천하여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는 무희들이 온갖 퇴폐 향연을 하였고, 당시 로마와 그리스 신전에는 대사제라고 불리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창녀들이었고, 다산과 풍요를 준다는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매음 행위를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고린도의 비너스 신전에는 천명이나 되는 창녀들이 있어 종교적 행위를 조장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성적타락 행위를 ‘고린도식으로 산다’고 일컬었습니다.

로마의 타락상은 대단했습니다. 그 예로 폼페이 화산폭발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남단의 캄파니아 해안도시였던 폼페이는 AD 79년 8월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졸지에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뒤덮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이 도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 찾을 수 없었으나 1860년 발굴 작업에 의하여 헬레니즘화 되기 전 로마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물 속에는 2층 목욕탕에서 남녀가 엉켜있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고 더 나아가 남자와 남자가 뒤엉켜 있는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고대 도시의 타락상이 극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도덕적 타락 현상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온갖 죄악의 늪에 빠져 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본래 남녀의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시 정해준 대로 일부일처의 결혼 관계 안에서 만이 아름다운 것이기에 일부일처제가 합법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2-28)

사도 바울은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복종하듯 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에 따르자면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이듯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복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복종은 사랑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복종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내는 남편을 인격적으로 사랑해서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아내의 인격적인 복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목숨을 다해 사랑했듯 남편이 아내를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주님은 사랑으로 한 몸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그러한 주님의 사랑에 화답하여 절대적으로 주님께 복종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죽기까지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격적인 사랑으로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므로 성결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도 서로 성결해야 합니다. 성결함으로 주님과 교회가 하나이듯 성결함으로 남편과 아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 외에는 모두 불륜이요 죄악입니다. 특히 인간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심정에 근거한 변태적인 성관계는 가증한 짓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근친상간과 동성애가 있는데 이것들은 무서운 죄악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심정이나 상황은 사랑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나 그들이 행한 그것은 죄로 알고 하나님께 회개하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근친상간과 동성애는 이미 고린도 지역에 만연되어 있었던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악은 지금도 만연합니다.

이런 죄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서 그런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많은 죄를 짓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자가 짓는 죄를 열거하였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절).

하나님을 떠난 자의 죄는 정말로 참담할 정도로 더러운 죄들입니다. 이렇게 죄짓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28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말은 ‘금이나 은 등을 불 속에 넣어 그 진위를 시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결과 마음에 모셔들일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고 마치 쓰레기처럼 내팽개쳤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공허한 인간의 마음 속에는 사탄이 자리를 잡고 사탄은 군대를 거느린 지휘관처럼 인간의 마음을 공박하여 완전히 더러운 죄에 빠뜨립니다.

구약 사사시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으나 말하기도 더러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릴 성도들의 헌금에 손을 댔고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습니다. 어찌 제사장이란 자가 이런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이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삼상2:12)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습니다.(삼상2:17)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이렇게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무서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신자만이 이 시대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올바로 설 수 있습니다.

 

3.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이렇게 추해질 수가 있습니까?

 

인간이 그렇게 더러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24절).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본문에서만 세 번이나 나옵니다(24, 26, 28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사업 실패, 교통사고, 질병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을 심판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죄를 깨닫고 회개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심판보다 영적인 심판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제일 무서운 심판입니다.

‘내버려 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포기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죄를 짓더라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내버려 둔다는 것 즉, 그 인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상할 수도 없이 무서운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를 포기하고 환자 마음대로 하도록 놓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환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책임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있습니다. 환자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영적으로 정신차려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엄청난 죄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호에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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