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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1.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하나님의 심판

관리자 2011-12-11 (일) 11:00 12년전 1299  

하나님의 심판

 

로마서 2:1~16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는 전쟁에 미친 히틀러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히틀러를 향해 말했습니다.

“그는 미친 운전사다. 차를 마구 몰며 선량한 사람들을 치어 죽이고 있다. 자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가 먼저입니까? 아니면 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놈을 끌어내려야(죽어야) 합니까?”

이 비유는 히틀러를 죽여도 된다는 명분을 삼고자 공개적으로 선포했던 말입니다. 이로 인하여 본회퍼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회퍼가 죽기 전 날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 속에서 하나님이 히틀러를 재판하고 계셨습니다. 히틀러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 히틀러는 그 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무고한 많은 피를 강물같이 많이 흘리게 했으니 지옥에 가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리라.”

그 때 히틀러가 하나님께 절규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그 누구도 하늘의 심판에 대하여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억울합니다!”

꿈에서 깬 본회퍼는 가슴을 치며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개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제거하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을 통해 우리가 벌을 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한 사람이라도 예외 없이 심판의 날에 상급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도록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주님의 복음을 직접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4절부터 31절까지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동성애 등과 같은 불의한 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이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의 행동조차도 옳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롬 1:32).

이런 자들이 지금 과연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때문에 바울은 매우 섬뜩한 어조로 남을 판단하는 자들 위에 장차 나타날 일들을 다섯 가지로 열거합니다.

첫째, 남은 판단하는 것은 네가 너를 정죄하는 것이다(롬2:1). 둘째, 남을 판단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나타난다(롬2:2-3). 셋째,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이다(롬2:4). 넷째,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머리위에 쌓은 것이다(롬2:5). 다섯째, 남을 판단하는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다(롬 2:9).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남을 판단하지 말고 그 판단의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1.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내가 체험한 하나님, 내가 공부한 성경말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 내가 읽은 책을 통해서 깨달은 것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분열되고, 서로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고 말합니다.

창세기 3장에 시작된 인류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리고 결국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왜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핑계를 대는 걸까요? 그것은 자신이 행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떳떳한 일이었다면, 절대로 핑계대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잘못한 일인지를 사람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서로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 “우리가 판단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다윗의 모습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충복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서 오히려 그 남편 우리야를 죽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부자가 자신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소와 양은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딱 하나 남은 암양새끼를 잡아다가 대접했다고 말했을 때, 다윗은 그 악한 자를 당장 데려오라고 노발대발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맹세하면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죄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자신에게 적용시키지는 않고, 다른 사람에게는 기가 막히게 잘 적용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남을 용납하고 용서하게 됩니다.

혹시 우리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지각하면 불가피한 일! 남이 지각하면 게으른 탓!, 내가 자리를 비우면 부득한 일! 남이 비우면 노는 것!, 내가 화내면 뚜렷한 소신! 남이 화내면 옹졸함!, 내가 아프면 업무로 인한 피로! 남이 아프면 꾀병! 내가 약속 어기면 그럴 수 있는 일! 남이 어기면 신용없는 사람!, 내가 상 받으면 당연한 일! 남이 받으면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다음의 권면에 따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1-4).

 

2.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압 평지에서 행한 모세의 설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신4:32-3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다만 사랑하셔서(신7:8)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율법을 지켜 복을 받도록 하셨고(신4:39-40), 또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이방인에게 전하는 제사장적인 역할을 감당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배반하고 멸시하였습니다(4절). 여기서 ‘멸시하다’는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고서 이를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칼날로 휘둘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개보다 못한 자로 여기면서 목을 꼿꼿이 들고 거들먹거렸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을 똑같이 받을 것이라고 말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이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이방인이나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남을 돌아보지 않는 유대인들의 외식을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심지어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책망과 경고를 하였음에도 목이 뻣뻣한 유대인들의 교만을 보시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셨습니다. 주님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마23:37) 그 백성을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주석가 벵겔은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으로 진노를 억제 하셨고, 그 용납하심으로 숨겨 주셨으며, 길이 참으심으로 심판을 지체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진로를 참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으심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으로 오래 참으신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옵니다.

에밀 부룬너는 “하나님의 진노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닥쳐오는 역풍”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주후 72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멸망 받아 세계 각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후 많은 고난을 받아 근 2천년 동안을 나라를 잃은 체 사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민족말살의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참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결국은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율법이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당신을 알도록 율법을 주셨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을 주셨습니다(14-15절).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지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율법은 가장 먼저 십계명이고, 좀 더 범위를 넓히면 모세오경이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먼저 양심을 주셨습니다. 양심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 즉 양심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습니다.

동물하고 다르게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죄라 여기지 않습니다. 본능으로 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에 자신을 속이지 못합니다.

율법을 몰랐을 때도 내 안에 있는 양심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송사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법을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라 했습니다. 양심을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기준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워진 양심, 화인 맞은 양심들이 되었습니다.

원래 양심은 하나님을 보는 거울이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변질되어 정욕으로 더러운 욕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깨진 거울과 같습니다. 동물들이 그렇듯 아무 생각 없이 정욕에 던져진 인생들의 모습을 보면 깨진 양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 있을까요? 지킬 수 없습니다. 양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요? 이미 깨어져 버렸기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율법과 양심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나와 있듯이,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인해 망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 즉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선포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심판에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율법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은 더러워진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날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무서운 율법과 양심의 심판에서 구원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율법과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다른 이에게도 전해 함께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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