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7.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주님을 사랑하는 자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1.02.27.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주님을 사랑하는 자

관리자 2011-02-27 (일) 11:00 13년전 1129  

주님을 사랑하는 자

 

요한복음 14:18-24절

 

제1차 세계 대전 때 끔찍한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전쟁에 참여한 두 명의 미군의 전우애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 밤 참호를 떠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전투는 격렬했고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친구는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길고 힘겨운 전투가 끝난 후 안전한 참호로 다시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한 친구가 돌아와 자기 동료에 대해서 여기 저기 물어본 결과 그 친구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아직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위험은 생각지도 않은 채 지휘관에게 가서 그 친구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지휘관은 대답했습니다. “절대 안 된다. 다시 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동료를 잃었다.”

그런데도 그 친구 군인은 지휘관이 다른 곳을 쳐다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처 입은 동료를 구하려고 안전한 참호를 뛰어나가 들판을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즉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정신을 앗아가는 폭탄 소리, 기침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목에 파고드는 연기, 그리고 머리 위로 날아가는 탄환 등으로 그는 피로 범벅이 된 흙 속에 자신의 얼굴을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낮는 포복으로 친구에게 다가갔고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은 후 친구를 다시 참호 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참호로 돌아오는 사이에 상처 입은 친구는 죽고 말았습니다. 깊은 슬픔에 잠긴 채 그 친구는 친구의 시신을 참호 안으로 끌어 당겼습니다.

그 때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종한 그 병사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 “네 목숨까지도 담보로 하고 친구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나?”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합니다. 비록 죽어 버렸지만 제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자네의 생명을 걸만큼 소중한 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예, 친구에게 다가가자 그 친구가 제 얼굴을 보고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와줄 줄 알았어’”

두 친구는 정말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우정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사지에서 죽어가고 있는 친구를 찾아 나섰으니 말입니다. 이런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고, 두 제자의 배신을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십자가를 앞둔 주님은 정말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또한 실망스러웠습니다. 예수께 많은 기대를 걸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는데 예수께서 붙잡혀 죽는다는 말씀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실망은 대단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으면 예수를 따랐던 공동체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실망에 빠진 제자들을 여러 가지 말씀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는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1.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고 하셨습니다.

‘고아’라는 말은 ‘부모가 없는 어린아이’라는 뜻입니다. 후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잃어버릴 제자들은 부모를 잃은 아이와도 같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었을 때 그 제자들은 ‘아비를 잃은 자식들 같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그런 모습으로 놓아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돌보러 오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 강림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표와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신 다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지금도 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성령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성도들에게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오늘날에도 세계 복음화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할 때는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떠나신 다음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는 달라졌습니다.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부흥사 무디는 고등학교만 나와서 주일학교 교사를 열심히 하다가 부르심을 받아 미국의 복음 역사에 위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양손에 쥐고 흔들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설교를 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열심히 설교를 하시는데 저는 전혀 은혜를 못 받았어요. 지금부터 목사님이 은혜로운 설교를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어요”하고 어떤 성도가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디는 너무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신이나 위해서 기도할 것이지 자신처럼 능력있는 목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니 너무 기분 나빴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태도가 교만이라는 것을 그날 저녁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점점 유명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무의식중으로 교만하고 있었음을 알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설교 강단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겸손해 했지만, 갑자기 방심한 사이에 한 성도가 기도하겠다고 하자 나 같이 능력 많은 사람에게 당신이 기도한다니 우스운 것을 떠나 불쾌했다는 생각이 들자 마치 허를 찔린 것처럼 자신의 교만한 내면이 들여다 보였습니다.

그는 이미 뿌리깊이 교만해 있는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성령을 주시옵서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진정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미국과 영국을 뒤흔드는 역사를 일으키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사모하는 이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이 땅에서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2.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래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말하는 것을 신뢰하고 그 말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관리가 예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8:18)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눅18:20)고 하셨습니다.

그 때 그 관리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18: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관리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십계명의 후반부에 있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전반부는 하나님 사랑 부분이고 후반부는 이웃 사랑 부분입니다. 물론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형이상학적인 철학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을 사랑하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주님 사랑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올 1월 어느 날 청주시 사직동 골목의 한 지하 쪽방(3평)에 신월선(58)씨가 들어서며 “잘 계셨어요?”라고 인사했습니다. 김영남(90) 할머니가 “어서 와”라며 반겼습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이지만 신씨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열무김치·떡·감자조림 등을 꺼내 밥상을 차렸습니다.

신씨가 떡을 건네며 “맛있어요. 꼭꼭 씹어 드세요”라고 하자 김씨가 “고맙네. 참 고마워”라며 신씨를 안았습니다. 신씨는 홀로 사는 이 마을 노인 20명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연히 만난 할머니를 돌봐 드리기 시작했다”며 “이렇게 많은 어르신을 돌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신씨는 1981년부터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를 모셨고, 11년 뒤인 1992년부터는 역시 중풍에 걸린 친정아버지까지 맡아 돌봤습니다. 남동생이 사고로 숨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아버지는 1992년, 친정아버지는 199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신씨는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어찌나 섭섭하고,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했던지…”라며 울먹였습니다.

1995년 가전제품 외판원이던 신씨는 오토바이를 타다 넘어져 왼팔에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갔을 때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고(故) 김완금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를 보고 간호사마저 눈살을 찌푸렸다”며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할머니 진료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도와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날 힘겹게 귀가하는 할머니 뒷모습이 눈에 밟혀 할머니의 쪽방까지 바래다 드렸습니다. 이후 반찬을 만들어 가고 목욕도 시켜줬습니다. 그녀는 “두 아버님께 못다 한 효도를 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2002년 가을 여느 때처럼 반찬을 들고 찾아간 신씨는 축 늘어진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할머니 수첩을 꺼내 자식에게 연락했습니다. 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신씨는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 어떻게 이렇게 버려둘 수 있느냐'고 따지며 펑펑 울었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닷새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와 그 옆집의 노인 한두 명을 돌보던 신씨는 이후 더 많은 노인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카드외판원으로 직장을 옮겼지만 독거노인 돌보기는 쉼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식도 외면하는 저 불쌍한 분들은 내가 챙기지 않으면 굶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 사랑을 통해서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3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비결을 주님께서는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주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4절).

주님을 본 자는 바로 하나님을 본 자요,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님에 대한 사랑이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직결된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재림 때 심판주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양과 같은 사람은 오른편에, 염소 같은 사람은 왼편에 두고 심판주인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과 같은 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그때 의인들은 의아해 하며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느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은 주님을 도와 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주님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로서 지극히 자은 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비유의 첫머리에 이스라엘 즉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나그네 한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도중에 강도를 당해 반쯤 죽은 상태로 길가에 버려진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가장 거룩하고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제사장이 그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 단계 아래에 있는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보통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보통 시민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길로 내려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유다 민족과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성경을 덮어놓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상상했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유대인 청중들은 “이 가련한 강도 만난 자가 마지막 은총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부분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순간 ‘아마도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자를 헤치고 말겠지’하고 생각을 했을 것이 뻔합니다. 그들은 원수 사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인들은 나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하면 나쁜 사마리아인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부상자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간호를 해줍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온 말에 이 강도만난 사람을 태우고 대신 자신을 걸어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숙식비까지 지불합니다. 그리고 지불한 것보다 더 들면 오는 길에 그것까지 다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좋은 사마리아인으로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이웃 중에는 제사장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보통 평민에 속한 유대인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강도를 만나 거반 죽은 상태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가련한 유대인의 가장 좋은 이웃일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좋은 이웃이 되어주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특별한 이웃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전혀 이웃일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이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는 비록 유대인의 혈통을 이었지만 그들은 그 혈통을 이방민족의 피와 혼합하였고 유대에서 떨어져 나가서 다른 종교 예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의 원수처럼 취급을 했으며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간 배교자로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랍비 문헌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음식을 먹는 자는 돼지의 먹이를 먹는 것이다’라고 나와 있을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이웃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누가 좋은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대답이 “자비를 베푸는 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당할만하니까 당했지,’ ‘잘 되었다’ 이렇게 대하면 안 됩니다. 좋은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조건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좋은 이웃이 아니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해서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를 베푸는 자가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일신상의 편의와 득실을 계산하는 이기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금 당장 도움을 주어야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바로 이 같은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야기 속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개, 돼지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이 아름다운 참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야말로 짐승 같은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인간 중에서도 인간으로 자부하는 바로 그 유대 선민들에게는 개, 돼지보다 못한 비인간적인 비열함과 매정함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 좋은 이웃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신음하는 인생들의 상처를 찾아내어 소독하며 치료해 주는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며, 고통과 아픔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일이라면 바쁘게 가던 길도 멈추고 도와 주어야 하는 사명자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강도 만난 처치에 있었다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 새 생명의 길을 지금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제2의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추운데 옷 사서 입어라, 배고픈데 밥 사서 먹어라’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닙니다. 좋은 이웃이 아닙니다. 지갑이 열려야 좋은 이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물질을 강도만난 사람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리고 더 필요하면 그것을 자신이 담당하리라 생각을 했고 그리고 약속을 했습니다. 좋은 이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물질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계명의 핵심은 이웃 사랑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여 주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