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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4.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강도 만난 자

관리자 2011-08-14 (일) 11:00 12년전 1247  

​강도 만난 자

 

누가복음 10:30-37절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 늙은 수도사는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수도사에게 “이 단단한 흙에다가 물을 좀 부어주게”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옆으로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수도가가 옆에 있는 괭이를 들고 흙더미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흙이 잘게 부서지자 늙은 수도사는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번 물을 부어보라고 했습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그제서야 부서진 흙이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나이든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 구만. 여기에 씨가 뿌려져야 앞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야. 그런데 우리도 역시 깨져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물을 주시고 씨를 뿌리시고 열매를 주시는 거지. 우리 수도사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한다네.”

우리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약27Km 정도 되는 거리로 광야를 통과해야 하는 상당히 험한 길입니다.

그곳은 가끔 강도가 출몰해 사람들의 금품을 털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는 강도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빼앗고 옷마저 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때려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고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음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도 제사장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유대에서 최고로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어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것은 아마 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빨리 가서 예배를 인도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약속이 되어 있어서 빨리 가야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들은 종교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부정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을 도와주다가 자신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일단 피하고 보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지나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그들의 행동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변의 강도 만난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36년 통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은 지 66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이번에 2018 평창 동계 올림픽까지 유치하게 되어, 1988년 하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까지 성공적으로 치른 그랜드슬램 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남북간에 대립이 격화되어 도무지 화해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천안함 피폭과 연평도 폭격으로 그 대립은 더욱 격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8.15 광복절을 맞아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남북관계를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1. 우리의 편견이 깨져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는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정성껏 도와주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성경에 능통하고 주위의 존경을 받는 종교인들이라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인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에 사마리아인이 자주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전 8세기에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으로 분리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인데, 앗수르에게 멸망합니다. 그리고 100년 후에 남 유다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인종 말살정책을 써서 사마리아에 있던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나라에 있던 인종을 사마리아에 배치합니다. 사마리아에 일부 남아 있던 유대인과 이주해온 사마리아들이 통혼함으로서 혼합 종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가장 경멸받은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 후에도 주전 6세기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이 계획에 참여하려는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혼혈인이라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별도로 성전을 세웠는데 유대인들이 이를 주전 128년에 파괴시켰습니다.

또한 주후 1세기에는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 경계에 있는 마을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던 유대인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로 몰려가서 주민을 대량학살한 일이 있었으며, 사마리아 인들은 유월절에 죽은 사람의 뼈를 성전 뜰에 뿌려 놓아 성전을 모독하여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였고,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그들의 성전을 짓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을 가려면 중간에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지경을 통과하는 것도 싫어서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우회하여 다니곤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거의 패거리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어떤 지방 출신이냐를 두고 사람들이 갈라서는데 이제는 강남이냐 비강남이냐로 사회 계층 간에 갈등이 있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한 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패거리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왕따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디에 끼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죽어가는 강도 만난 이웃, 버림받은 유대인을 살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편을 가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나라에 사는 우리의 형제요 자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 북한의 2천 3백만 동포가 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통일되어 같은 나라를 이룰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과 하나됨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본문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라고 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성경에 능통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그냥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과 레위인도 불쌍히 여겼을 것입니다. 안됐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도와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따뜻한 마음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보면 불쌍한 마음을 갖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돕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합니다.

북한의 굶주림 백성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마음은 아파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을 일으킨 자들이라고 싸잡아서 적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기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이 혹시 본래 서로 아는 사이였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강도에게 걸려 죽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도와 줄 수 있었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본성상 착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마 제사장과 레위인도 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사랑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불쌍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해관계와 이기적인 눈으로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나 장기려 박사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를 위해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를 사랑의 눈으로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 눈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런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의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강도 만나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하는 것, 즉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이 말처럼 쉬울 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그로 인해 그는 예루살렘에 늦게 도착했을지도 모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다가 옷에 피가 묻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주머니에 가진 돈이 공금이라, 여관주인에게 돈을 지불한 것이 뜻밖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늦게 도착하여 제사 시간에 늦게 도착했다면, 그는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 시간 하나도 못 지키느냐?”

또 피 묻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제사장을 본 사람들은, 제사장이 어떻게 피 묻은 옷을 입고 다니냐고 비난할지도 모르며 어디서 싸운 것 아니야, 싸우다 옷에 피가 묻은 것 아닌가, 라는 오해를 할지도 모릅니다. 허락 없이 공금을 사용했다고 비난을 받을지도 오릅니다.

그런 타인의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 그 제사장은 강도 만난 그 사람을 그냥 못 본 척 하고 지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척 하고 지나가 무사히 아무 일도 없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 제사장은 사람으로부터 왜 옷에 피를 묻히고 다니느냐는 불필요한 오해, 왜 예배 시간에 늦었느냐는 오해를 전혀 받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제사장으로서 존경받으며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예배 시간에 늦게 도착한다거나 혹은 옷에 피를 잔뜩 묻히고 교회에 나타난다면, 아마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한 따가운 시선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구차한 이야기를 길게 해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과 경우만 다를 뿐이지, 이런 어려움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똑 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강도 만난 사람, 예를 들어 현실의 경제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하려다 돈을 많이 썼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도와주고,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다”는 뿌뜻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카드 대금 명세표가 날아옵니다. 부인이 카드명세표를 보더니 깜짝 놀랍니다.

“아니, 이 이가 지금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200만원이면 우리 아이들 과외비가 몇달친데…”

“당신은 전혀 현실 감각이 없어, 내가 못 살아, 못 살아”하는 이야기를 단 한번만 듣는다 하더라도 아마 다음 번에 강도만난 사람을 만나면 먼 발치로 보면서 못 본척 하고 돌아 갈 것입니다.

마음 속 한편에서 양심이 자꾸 다시 돌아가자 하지만, 카드 결제일에 듣게 될 소프라노 소리를 생각한다면 발걸음은 자꾸만 그 현장에서 멀리 멀리로 우리를 몰아갈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강도만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가서 도와주고 산다면 아마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련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 모두가 ‘밥통 같이’ 미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을 이해하고, 그런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강도만난 사람의 참된 이웃이 되리라는 굳은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시각으로 보고 비난한다면 그 신념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한 사람을 이해해 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북돋아 주고 격려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야만 그런 일을 만났을 때에 우리가 서슴없이 뛰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밥통 같은 사람 같으니”라는 말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영악하고, 세상에서 성공을 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우리 모두 밥통이 된다면,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우리는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주님께서 영원히 예비한 나라에 들어갈 의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그 때 의인들이 놀라며 “주님,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습니까”하며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강도 만난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과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가난한 자 같은 지극히 작은 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속에서 주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피하여 지나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작은 자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시대의 지극히 작은 자는 북한입니다. 김정일 체제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해서 굶주린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독일에서는 동독과 서독이 분단되었을 때 교회는 나누어지지 않고 같은 교단을 유지하며 서독에서 헌금해서 동독의 교회를 도왔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몇 년 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될 때까지 했습니다. 그런 서독 교회의 사랑의 눈이 결국 독일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북한을 향한 모든 편견을 버리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 보며 함께 나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통일의 그 날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극히 작은 자 속에서 계신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지극히 작은 자는 바로 북한 동포들입니다. 북한 동포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고 북한 동포를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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