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7년 12월호
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캠프에 다녀와서
배태진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상임이사
로힝야 난민 및 유혈사태를 뉴스로 처음 접한 것은 올해 2017년 8월 말이었다. 로이터」에 보도된 내용과 달리 국내 미디어들은 로힝야 난민사태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테러들과 달리 비중 있게 다루거나 신속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을 보도할 때 로힝야 난민사태가 왜 발생하였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기보다는 노벨평화상을 탄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가 이에 대하여 왜 침묵하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그 보도들의 무게중심과 방향은 잘못되었다. 이 사태가 발생한 근본 원인과 이들을 위해 우리가 그리고 국제사회가 공조하여 무엇을 먼저 긴급하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보다 공정하였을 것이다.
사단법인 지구촌구호개발연대1(이하 ‘지구촌구호’)는 로힝야 난민사태를 접하고 구호개발단장을 현장에 파견하였다. 현재 구호개발단장은 로힝야 난민들이 집단으로 기거하고 있는 꾸투팔롱 지역에 병원을 세우고 있다. 그 상황을 살피기 위해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3일까지 6일 동안 지구촌구호의 이사장(전병금 목사)과 상임이사인 필자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족 집단난민촌을 구석구석 방문하고 돌아왔다.
본 기고문을 통해 로힝야 난민사태의 발생과 원인, 고통의 상황을 인식하고, 지구촌구호가 병원을 세우고 있는 일과 한국교회가 선교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로힝야족, 그들은 누구이며 왜 난민이 되었는가
로힝야족의 전체 인구는 약 130만 명으로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북부지역에 정주하던 이슬람 소수민족이다. 이들이 방글라데시, 태국, 말레이시아 등지로 긴급 피난하게 된 것은 2017년 8월 25일과 30일에 발생한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과 미얀마 군경의 충돌과 학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이전에도 이미 30만 명 정도가 미얀마 군사정부의 박해를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져 난민생활을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훨씬 이전에 로힝야족은 인도에 살고 있었다. 인도와 미얀마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영국은 미얀마를 쌀 생산기지로 삼기 위하여 쌀 재배농법을 잘 알고 있던 옛 인도, 지금은 방글라데시 지역에 사는 벵골인들을 이주시켜서 경영을 맡겼다. 이들이 바로 로힝야족이다. 영국은 이들에게 땅을 주고 미얀마 사람들을 다스리는 중간지배계층으로 활용하였다.2 미얀마인들은 식민통치 기간 중에 이들 로힝야인을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왜냐하면 로힝야인들이 가지고 있던 농지는 영국이 미얀마인들로부터 빼앗아 준 것이고, 로힝야인들이 당시 미얀마를 호되게 다스렸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인도(1947. 8. 15. 독립)와 미얀마(당시 국가명 버마, 1948. 1. 4. 독립)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에도 로힝야족들은 살던 대로 미얀마 라카인주에 고향처럼 머물러 살았다.
하지만 이들에 의하여 땅을 빼앗기고 박해를 받았던 미얀마인들은 한때 자신들을 다스리던 로힝야족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고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미얀마 군사정부는 이들의 공민권을 박탈하였고 주민등록을 받아주지 않아 로힝야인들은 무국적자이자 불법체류자로 전락하였다. 또한 그들이 가진 토지를 다 빼앗고 거주와 이전의 자유도 박탈하였다. 로힝야족들의 자식들은 공교육 역시 받을 수 없었고, 어떤 자격증을 소지하거나 전 문직을 가질 수도 없었다. 심지어 결혼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사실상 인권을 말살하고 생존권조차 제약시킨 일련의 조치에는 “너희들은 이 땅에서 살지 말고 원래 너희 나라 지역인 방글라데시로 가라.”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로힝야족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고, 미얀마는 불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이기에3 로힝야족을 향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가 더 심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이렇듯 압박과 설움을 받던 로힝야족은 인간 이하의 생존 환경을 더이상 견딜 수 없다 하여 미얀마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이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이다. 미얀마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들 무장세력은 지난 2017년 8월 25일 미얀마에 있는 30여 개 경찰 초소들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미얀마 군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테러분자들을 토벌한다는 구실 아래 이들을 제압하고 체포하는 선을 넘어 1,000명 이상의젊은 로힝야족을 총과 대검으로 학살하였다. 또 다른 지역에서도 그들을 불더미 속에 집어넣어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이 이루어졌고, 주거지역에 집중적으로 방화를 저지르고 수많은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미얀마 군부와 경찰, 극단주의적 승려가 합세하여 로힝야족을 미얀마 땅에서 살 수 없도록 아예 몰아내는 군사작전을 펼친 것이다.4
대량살상과 토벌작전에 로힝야족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살벌한 환경에서는 도무지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일부는 말레이시아로, 일부는 태국과 인도네시아로, 대부분은 방글라데시로 긴급 피난하였다. 미얀마에서 말레이시아나 방글라데시로 가는 국경에는 강과 바다, 만이 가로 놓여 있는데, 보트에 너무 많은 인원이 승선하여 수백 명의 피난민이 물에 빠져 죽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지난 8월 충돌과 살상 이후 9주간(8월말-10월) 발생한 로힝야 난민들의 숫자를 약 62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난민들이 계속 국경을 넘어오기 때문에 이 숫자는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다. 또한 유엔은 8월 25일 이전에 미얀마 정부의 학대로 국경을 넘어온 이들이 이미 30만 명 이상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렇다면 92만 명이 넘는 이들이 방글라데시 집단 난민촌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바라본 로힝야족의 모습
이런 상황을 접한 지구촌구호는 긴급 이사회를 개최하여 몇 가지 사항을 의결하였다.5 첫 번째로 이 사태가 발발한 이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현지 난민촌이 형성되고 있는 방글라데시 꾸투팔롱 지역에 구호개발단장을 긴급 파견하여 로힝야 사람들의 피난 상황에 대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로 지구촌구호가 그 재난지역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사장과 상임이사가 난민 현장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이 의결에 따라 지구촌구호의 이사장과 필자는 지난 10월 29일 방글라데시에 입국하였다. 수도인 다카에 도착하여 콕스 바자르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탄 후 난민촌이 있는 꾸투팔롱 지역까지 승합차를타고 들어가는 먼 여정이었다. 들어가는 길목 요소요소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검문검색을 하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난민들이 나올 수 없도록, 또 외부 세력이 들어갈 수 없도록 방글라데시 정부가 특정 지역에만 거주하도록 난민촌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꾸투팔롱 지역 가까이에 이르자 도로를 중심으로 이동하거나 그저 주변에 서 있는 로힝야인들이 많이 보였다. 검은색 차도르를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거나 손잡고 있는 모습도 많았고, 그저 수십 명씩 길거리에 주저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우두커니 보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옷을 입지 않은 모습이 의외로 많았다.
지구촌구호 일행은 사나흘간 난민촌이 형성된 거주처들을 다니면서 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았고 주변에서 이들의 삶의 상황을 듣게 되었다. 난민의 수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고 있는 가운데 방글라데시 국가수반인 하시나 총리는 난민사태 초창기만 해도 로힝야 난민들에게 미얀마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여 방글라데시 안에 80만 명의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난민들
난민촌의 모습
수용 발표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이고 최빈국 중 하나이다. 현실적으로 난민을 수용하여 적정하게 인간적인 생활을 누리게 할 어떤 방책도 없이 난민들이 거처할 천막을 만드는 재료 정도만 제공하고 있는 형편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유니세프(UNICEF)가 현장에 와서 조사와 취재를 하고 있고 간간이 유엔과 유니세프의 차량이 눈에 띄거나 유엔난민기구의 로고가 새겨진 천막이 드문드문 있지만, 어떤 실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지는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로힝야인들 중에 쌀이 담긴 자루를 머리에 이거나 들고 가는 고무적인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하기도 하였다. 그곳에 와서 캠프를 차린 유엔식량프로그램(World Food Program)의 활동 덕분이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터키가 자국의 국기와 함께 대형 솥단지를 걸어놓고 수천 명의 난민이 줄을 서서 정오에 밥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을 나누어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구호인력이나 난민촌의 모습 엔지오 단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로힝야 난민사태를 온 세계가 뉴스와 방송에 내보내고 있는 가운데 저들을 본격적으로 돕는 일이 진척을 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도움이 절실한 그곳에는 유엔 관련 단체들의 차가 오갈 뿐 실제적으로 로힝야를 돕는 활동은 대부분 방글라데시 엔지오 단체들이 하고 있었다. 세계의 많은 구호단체들이 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지 않을까? 아마도 로힝야 사람들이 대부분 이슬람이기 때문에 혹시 이들과 아이에스(IS)가연결되어 있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로힝야 사람들 중 특별히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이 이 아이에스 테러조직과 연계하여 테러를 행하려 한다는 의구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어찌 되었든 이런저런 이유들이 구호단체의 활동을 더디게 만들고, 이것이 로힝야 사람들의 고통은 더 크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그동안 지구촌구호 구호개발단장이 파악하여 보고한 상황과 필자가 실제 방문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종합해서 로힝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몇 가지로 정리해본다.
첫 번째 고통은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6 난민사태 초창기에는 각종 유엔 기구가 양식을 긴급하게 공급하기는 하였으나,그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어린아이부터 영양실조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난민들이 직면한 두 번째 고통은 마실 물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꾸투팔롱 지역은 필자가 방문할 때에도 연일 비가 왔다. 강수량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마실 만한 물은 턱없이 모자랐다. 10m 깊이의 우물이 있기는 했으나, 바로 그 옆에는 땅속으로 배설물이 스며들도록 간이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다. 상수원으로 사용되는 물과 땅속에 묻어 놓은 변기통의 물이 뒤섞인 상태로 수인성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난민들은 아무 데서나 대소변을 누어서 그 물이 이리저리 흘러다 니고 있었다. 난민들은 그저 냇가에 있는 오염된 물을 떠다 밥을 하고 그대로 마시고 있었다.
난민들이 당하는 세 번째 고통은 고향을 두고 떠나온 슬픔이다. 현재 집단 난민촌에 있는 이들은 노을이 지는 석양에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접경 근처의 동산에 올라가서 자기들이 평생 살았던 라카인주 쪽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짓는다. 필자도 그 동산에 함께 올라가 바로 지척에 있는 미얀마 땅을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그저 서서 침묵으로 그곳을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긴 역사를 올라가면 저들은 인도 북부지역에서 살았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자기네 민족(부족)이 아니라 하고, 미얀마에서는 자신들을 벵갈리(Bengali)라 부르면서 내쫓으려는 상황에서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주변인, 경계인이 된 것이다.
로힝야 난민들이 당하는 네 번째 고통은 어린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서둘러 피신해 왔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거나 부모를 동시에 잃은 상당수 어린아이가 자기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로힝야병원 주변으로 오는 아이들 중에는 아홉 살 남짓의 아이가 네 살 정도의 아이를 안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방글라데시 사회서비스국 조사에 따르면 초창기 난민 32만 명 중 아동이 60%를 차지하였으며, 그중 3분의 1은 5세 미만의 영유아라고 발표하였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밥과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았지만,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아이들이 입은 상처(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프로그램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로힝야 난민들이 겪는 다섯 번째 고통은 출산의 문제이다. 남편은 미얀마에서 학살을 당하고 부인은 강간을 당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한 후 방글라데시로 건너온 여성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고 있다. 학살자인 원수의 아기를 임신하였지만, 낙태할 방법도 없이 어쩔 수 없이 출산을 해야 하는 여성들은 삼중 사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7 현재 방글라데시 정부는 유엔 단체의 도움을 얻어 임신한 여성의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들이 안전하게 출산하도록 산부인과를 설치하고 수술과 출산을 지원해야 하는데 그 어떤 일도 아직 준비되지 않은 채 정작본인들은 배 속의 아이, 남편을 죽인 원수의 씨를 낳아서 키워야 하는 지 내버려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출산할 처소가 없어서 길거리에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게 보고된
다고 한다.
로힝야족의 아이들
지구촌구호의 선교적 대응과 한국교회의 과제
지구촌구호에서 파견한 구호개발단장은 한 달 동안 로힝야 난민 거주지역에 살면서 이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병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법인에 보고하였다. 90여 만 명이 집단으로 거처하는 곳에 임시적인 진료센터는 있지만 검사나 입원, 출산과 격리치료가 가능한 병원은 단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로힝야 난민사태에 대한 제반 대책을 위임받은 이사장은 여러 협의를 거쳐 구호 성격의 병원을 세우기로 하였다. 병원의 이름은 본 법인의 이름과 로힝야 난민을 조합하여 “지구촌 로힝야 구호병원”(Global Relief Hospital for the Rohingya)이라 하였다.
이 병원을 세우기 위해 지구촌구호는 방글라데시 정부기관의 허가를 받았고(2017. 10. 5.) 대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건평 300평 규모의 병원을 건축하고 있다. 이 병원은 먼저 로힝야 산모들의 출산을 돕고 출산 이후에도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을 돕는 처소가 될 것이다. 또한 일반 환자들의 수술과 입원도 함께 진행해 나갈 예정이다.
이 병원에는 접수실, 환자 대기실, 검진실, 진료실(3개), 약제실, 수술및 분만실, 여자입원실(60인용), 남자입원실(40인용), 유기아동 보호실, 남녀 격리병동(2개), 여성심리치료 및 위기상담실, 화장실, 샤워실, 주방 및 식당 등이 마련될 것이다. 현재 모든 구획에 대한 칸막이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이제 바닥 콘크리트 공사와 여러 의료기기 및 입원실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 의사와 간호사는 우선 방글라데시 현지 인력을 채용하여 진료를 시작하고, 앞으로 국내외 의료진과 의약품의 협력을 구할 예정이다.
이사장과 필자는 10월 30일에 건축 중인 병원을 방문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이사장은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방글라데시인들로 구성된 ‘한-방글라데시 친선우호협회’ 회원들과 함께 이 병원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장)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는 주막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지구촌구호에 속한 모든이들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의 정신을 재해나 재난을 당한 이들 가운데 실현하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지구촌 로힝야 구호병원은 앞으로 100만 로힝야 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고 가야 할 길이 멀다. 이 사업을 위해서는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기에 “로힝야 난민을 위한 구호병원을 위한 자선만찬회”(2017. 12. 12. 오후 6시)를 열고 거기에서 얻어진 수익금을 병원을 설립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씀(빌 4:6)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이 일을 해나가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롬 13:8) 우리는 지나온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6・25전쟁과 전쟁 이후에 우리나라가 세계의 많은 나라로부터 구제와 구호를 받았듯이 이제 한국과 한국교회는 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이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아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난 9월 2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에 참여하여 로힝야 난민사태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위원회는 당시 회의에서 한국교회가 이들을 위한 선교적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국제위원회는 10월 12-16일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60주년 기념 선교대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방글라데시교회협의회, 미얀마교회협의회 간의 모임을 통해 이 문제에 적극 적으로 대처하기로 결의하였다.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결과 야 난민사태에 대한 역사적, 현실적 인식에서 미얀마교회협의회와 의견 차이가 다소 있음을 발견하였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방글라데시교회협의회는 미얀마교회협의회가 이를 위하여 화해와 중재의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미얀마교회협의회도 적극적인 선교적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화답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회원교단과 교회들에 로힝야 난민들을 위해 기도와 헌금을 요청하였다. 국제사회도 더 이상 미얀마 라카인주에거주하고 있는 로힝야족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화해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소망한다. 로힝야인들이(어떤 사람이), 미얀마에서(여리고 언덕에서), 인종주의 종교광신주의 민족주의를 만나(강도떼를 만나), 이제 난민이 되어 꾸투팔롱 지역에 쓰러져 있는데(피 흘려 빈사상태로 쓰러져 있는데), 우리 한국교회가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 물과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옷과 안식처를 마련해주고, 병원으로 인도하여 치료해 주는 그런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방글라데시 꾸투팔롱의 로힝야 난민들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병원이다. 이병원을 세우는 일에 한국교회와 성도들께서 동참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註)----------------------------------------------------
1 (사)지구촌구호개1 지구촌구호개발연대(Global Relief-Agape in Solidarity)는 2016년 3월 31일에 창립되었고, 6월 16일 대한민국 외교부 소관 비영리법인으로서 서울시 허가를 받아 설립된 법인이다. 지구촌에서 재해와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현장으로 달려가 긴급구호를 하고 재해와 재난을 당한 지구촌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다. 더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www.gras.or.kr)를 참고하라.
2 영국의 식민지 중 로힝야족과 비슷한 역사적 실례가 바로 스리랑카의 타밀족이다. 영국은 사탕수수와 면화를 얻기 위해 인도 남서부에 있는 타밀족을 식민지 스리랑카로 데려다가 일을 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두 나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스리랑카는 타밀족을 억압하여 양자 간에 30년 내전이 발생하였다. 결국 스리랑카 정부군은 이들을 진압하였는데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3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얀마의 종교는 불교 89.5%, 기독교5%, 이슬람교 4%, 힌두교 1%이며, 방글라데시의 종교는 이슬람교 83%, 힌두교 16%, 불교 0.7%이다.
4 유엔은 이를 인종청소와 종교박해라 규정하였다.(유엔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언급한 행위 외에도 이미 피난한 로힝야인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돌아오는 길목에 미얀마 군부가 대인지뢰를 설치한 것이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5 지구촌구호는 아래와 같이 정관에 그 목적을 명시하고 있다. “본 법인의 목적은 첫째, 정의평화 생명의 정신과 인도주의 정신을 가지고 회원 및 단체들 간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지구촌의 각종 재난과 재해에 필요한 긴급구호와 동시에 재건, 복구, 개발과 협력에 나서며, 둘째, 재해지역의 빈곤 및 질병퇴치, 영유아 영양과 아동교육, 모자보건, 주거환경의 마련 등 인도적 지원에 나서며, 셋째, 지속가능한 개발과 협력 원칙에 따라 재난지역의 환경보호 등의 사업을 추진하며, 넷째, 지구촌 기후변화에 따른 각종 재해와 재난의 예방책을 마련하여 함께 나누며, 다섯째,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지구촌을 살리고 항구적인 평화를 실현하는 데 있다.”
6 이 글을 쓰는 지금 11월 초에는 유엔난민기구 등이 난민들에게 쌀을 공급하여 절대기아 상태에서는 벗어나고 있는 양상이다.
7 이를 위하여 방글라데시 정부는 국제이주기구(IOM,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Migrant)로 하여금 이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있고, 필자는 이들 직원을 만나서 그 내용을 들은 바 있다.
8 의료봉사나 후원 등 로힝야족을 위한 병원 건립과 운영에 도움을 주려면 (사)지구촌구호 개발연대(02-744-1895)나 배태진 상임이사(010-3914-9220)에게 연락하면 된다. 지구촌구호개발연대는 기획재정부 지정기부금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배태진
한신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강진읍교회에서 목회하였고,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가슴이 따뜻하신 하나님』, 『발을 씻어주신 하나님』 등이 있다. 현재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