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게 준 축복
엡 2:11-19
유대인들은 세계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도 독특하고 불가사의한 민족입니다. 인구로 보면, 세계 인구의 0.25% 밖에 되지 않는데, 노벨상 수상자의 27%나 차지하고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도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아인슈타인, 빌 게이츠, 스티븐 스필버그, 에디슨 같은 과학자나 기술자들도 많고, 로스 차일드, 록펠러 같은 세계적인 갑부들도 많습니다. 이밖에도 지그문트 프로이드, 엘빈 토플러, 아담 스미스, 뉴턴, 토마스 만, 카프카, 쇼팽, 맨델스존, 채플린, 레닌 등 각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대단한 민족입니다.
영토도 작고, 인구도 적은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세계인들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 몇 번이나 나라가 망하고, 2천년 동안이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민족과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부심과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말씀과 탈무드를 읽고 외우고 끝없이 토론하며, 그들의 뼈 속까지 신앙이 자리 잡도록 자녀들을 교육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철저한 신앙교육이 그들이 이루어 놓은 놀라운 업적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들이 선민의식을 의지하여 민족의 고난을 헤쳐나간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 선민의식이 지나쳐서 다른 임족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열등한 민족이라고 하여,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애굽, 앗수르, 바벨론, 그리스, 로마 등의 이방제국으로부터 당한 고난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입장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하기 위해 창조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가 하면, “뱀과 이방인은 많이 죽일수록 좋은 일이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이방인 혐오가 도를 넘어섰습니다.
실제로 유대인 청년이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면,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 유대인이 이방인 산모의 진통을 도와주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정도로 유대인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적대시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오직 유대인들만 사랑하신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에베소서는 ‘유대인’인 바울이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쓴 편지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선민사상에 의해 차별받던 이방인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고로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었던 시기를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었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대해 외인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 전 역사에 주어졌습니다. 약속의 언약(엡 2:12)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길고 긴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러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들에게는 어두움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줄기 빛처럼 이방인들에게 비추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탐욕만이 가득했던 세상 속에서 살던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며 광명의 빛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가까워졌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의 언약의 관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관계회복에 ‘피’라는 매개가 필요한 것인지 성경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인간은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죽음’으로만 해결될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동물에게 전가하고, 그 동물을 대신 희생함으로써 용서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동물의 피흘림으로 인한 죄인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 이것이 곧 제사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제사 의식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만 주신 탁월한 의식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곧 자신들만 제사 의식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피로 용서받는 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적용된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 또한 예수의 피흘리심으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선포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용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여겨지던 이방인까지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사역을 그토록 필사적으로 방해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이와같이 유대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과 왜곡된 제사 의식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차별의식은 철저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성소와 이방인의 뜰 사이에 담이 세워놓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모든 차별의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그렇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더 이상 아무런 차별 없이 죄용서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모든 장벽과 차별이 무효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세계에 있는 교회는 하나가 되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차별의 담은 존재의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방인이었던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허물어진 담을 다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셨는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가 서로 반목하여 분열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허문 담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 장로교는 세 번의 대 분열을 겪었는데, 1952년에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 차이로 ‘고신’이 분리되어 나가고, 1953년에는 신학적 노선 차이로 예장과 기장이 분리되었으며, 1959년에는 WCC 가입문제로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장로교단은 끊임없는 핵분열을 거듭하여 수백개의 교파가 난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교회가 이렇게 조각조각으로 찢어지고 나누어져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씁쓸한 모습입니다.
한국사회도 계층간, 지역간, 이념간의 담이 허물어지기는 커녕, 날로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담이 남과 북을 가로막은 담일 것입니다. 군사정권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해 조금씩 허물어져가던 담은 근래 들어 다시 높아지고 견고해 지고 있습니다. 이는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남과 북은 서로를 원수로 여기던 막힌 담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남북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담까지 헐었는데, 우리 손으로 그 담을 다시 쌓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6-18)
남북이 막힌 담을 허물고 다시 하나가 되는 통일의 문제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논리만으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형제 사랑의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도 하나가 되었듯이, 남북의 형제들도 십자가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어떤 원수 된 것도 십자가로 소멸할 수 있고, 그 누구와도 화해하여 하나가 될 수 있고, 남과 북의 분단의 골이 깊어도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외롭지 않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어린아이들은 비록 힘도 약하고, 지혜도 부족하지만, 부모와 가족이 있어서 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헤쳐나갈 힘을 얻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도 우리의 힘 되신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의 문제도 주님께서 해결해 주셨는데, 그 외에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자들은 결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분쟁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멸시하고, 혐오했던 것처럼, 교인들 가운데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내의 갈등과 분쟁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매우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선교의 문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자초할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하신 예수님의 화해의 사역에 순종하여, 누구와도, 어디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